지난해 서울시교육감 선거에서 진행된 진보·개혁 진영 ‘후보 단일화 협상’의 내막이 드러나고 있는 가운데, 곽노현 교육감의 사퇴 여부를 둘러싼 진영 내부의 논쟁도 격화되고 있다.

한겨레와 경향은 당시 곽노현 후보측과 박명기 후보측 인사들의 증언을 종합해, 단일화 타결 직전인 5월 18일 양측의 측근들끼리 모종의 ‘구두 약속’이 있었다는 사실을 31일자 신문에 동시에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이날 밤 서로 인척 사이인 박 후보측 실무자와 곽 후보측 회계 담당자 간에는 “우리 캠프가 진짜 어렵다. 곽 후보는 안 들어 줄 테니 대신 형님이라도 도움을 좀 주겠다고 약속을 해달라”(박 후보측), “기운내라. 어려움을 함께 헤쳐나가 보도록 하자”(곽 후보측)는 대화가 오간 술자리가 있었다. 박 후보 측은 이를 사실상의 ‘구두 약속’으로 받아들였고 이후 돈을 요구하는 근거로 제시했다. 하지만 곽노현 교육감은 당시엔 이 사실을 몰랐다가 당선 몇개월이 지난 후에야 전해 듣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5월 17일 김상곤 경기도교육감 후보(사진 왼쪽) 개소식에 참석한 곽노현 서울시교육감 후보(사진 왼쪽 두번째) .
 
곽노현 교육감 당선에 큰 역할을 한 진보·개혁 진영은 사건이 알려진 직후엔 ‘즉각 사퇴’ 목소리가 더 강했으나, 지금은 ‘진실’과 ‘법의 심판’을 강조하는 분위기가 적지 않다. 전교조·참교육학부모회·민주노총·참여연대·민주화를위한교수협의회 등이 포함된 40여개 시민사회단체는 30일 성명을 발표해 “어떠한 이유로든 2억 원이라는 큰 금액을 주어서 사회적 물의를 야기한 것은, 공직자로서 그리고 교육자로서 부적절한 처신이었다”고 비판하면서도 사퇴 문제에 대해선 유보적 입장을 나타냈다.

이날 기자회견에 참석한 박원석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은 사퇴에 대한 질문을 받고 “사건 당사자들 사이의 증언과 주장이 극단적으로 엇갈리고 있다”며 사실 규명이 우선이라고 밝혔다.

전병헌 민주당 의원과 유시민 국민참여당 대표 또한 ‘사퇴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전 의원은 30일 개인 성명을 통해 “조급한 사퇴 압박으로 목욕물 버리려다 아이까지 버리는 우(愚)를 범해선 안된다. 저들이(검찰 등) 노리는 것은 우리의 조급한 결벽증을 자극하려는 것이 아닐까”란 의구심을 던지며 “곽노현 교육감 탄생은 야권 연대와 통합의 상징이기도 하다. 곽 교육감에 대한 ‘묻지마 사퇴’를 반대한다”고 말했다.

29일 오후 국민참여당의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한 유시민 대표 역시 “곽노현 교육감의 경우, 본인이 사실관계를 밝히고, 대가성이 없다고 했다. 그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그것이 법적으로 벌을 받아야 되는 일이었는지, 그냥 현명치 못했다는 비판 정도만 받아야 되는 일이었는지 판가름 날 때까지 무죄추정의 원칙에 입각해서 보는 것”이라며 “그러니까 곽노현 교육감은 지금은 사퇴하면 안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사태 직후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사퇴의 필요성·정당성을 강조하는 흐름도 만만치 않다. 28일 자신의 트위터에 “단일화의 수혜자가 양보한 측에 돈을 건넸다는 점에서 의혹을 사기는 충분하다”는 입장을 밝혔던 시사평론가 진중권씨는 29일·30일에도 “각서가 있든 없든, 구두로라도 그런 약속을 했다면, 그건 도덕적으로 문제가 된다. 진보나 개혁을 말하는 사람들이라면 이런 문제에 누구보다 더 가혹한 기준을 들이대야 한다”, “곽노현, 당장 사퇴해야 한다. 혼자서 교육감 된 것인가? 진보·개혁 진영에서 함께 세운 '공인'이라면, 법적 책임에 앞서 일단 도덕적 책임을 져야 한다”며 사퇴에 기반한 비판을 계속 이어갔다.

노회찬 전 진보신당 대표도 29일 당의 공식 논평 내용과 마찬가지로 ‘사퇴’ 쪽에 더 무게를 실었다. 노 전 대표는 30일 한 라디오프로그램에 출연해 “진실은 곽노현 교육감이 가장 잘 알고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교육감직에 집착하는 것을 떠나서 지지해준 다수의 서울시민들을 위해서도 진실을 제대로 밝히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곽노현 교육감 당선에 핵심적 역할을 했던 전교조 내부에서도 ‘사퇴 불가피론’이 흘러나오고 있다. 전교조 기관지인 <교육희망>은 29일자 인터넷판에 실은 <‘2억 폭탄’ 맞은 서울교육, 어디로 가나>란 제목의 기획 기사에서 “대가성이 확인되지 않을 경우에도 문제는 남아 있다. 도의적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는 탓”이라며 “이런 상황에서 곽 교육감이 교육감직을 유지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곽 교육감의 측근이 은행 거래를 통해 돈을 넣는 순간 ‘사퇴의 늪’에 빠지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겠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경향신문 31일자 사설
 
애초 ‘시간 문제’라는 전망과 달리, 당사자인 곽노현 교육감은 일단 사퇴를 전혀 고려치 않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28일 기자회견에서 밝힌 “범죄인지 아닌지, 부당한지 아닌지, 부끄러운 일인지 아닌지는 사법당국과 국민의 판단에 맡기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셈이다.

손학규 민주당 대표와 박지원 민주당 의원,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등 처음 사퇴 요구가 대세를 이룬 것과 달리, 현재는 곽 교육감을 지탱할 든든한 우군세력도 만만치 않은 양상이다. 하지만 문제는 언론이다. 한겨레와 경향 등 대다수 진보·개혁 언론이 사퇴 쪽에 더 무게를 싣고 있어 향후 곽 교육감에겐 큰 부담이 될 전망이다.

경향은 31일자 사설에서 “불법 여부가 확정되기도 전에 사퇴하라니 억울하다는 생각이라면 사태를 너무 안이하게 인식한 것”이라며 “곽 교육감이 진정 교육혁신의 성공적 추진을 바란다면 사즉생(死卽生)의 자세가 필요하다. 지금 필요한 것은 과오를 인정하고 책임지는 모습이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진보진영의 위기를 극복하고, 교육혁신을 흔들림없이 지속할 수 있을지 고민할 때”라며 사퇴를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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