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온라인에서 대한민국 여성가족부의 유명세가 심상치 않다. 검색어 상위권 진입 횟수로는 행정부서 가운데 최고를 달리는 것 같다. 유명세의 발단은 지난 6월경 한 비주류 밴드의 리더가 온라인과 트위터를 통해 여성가족부를 성토하고 나선 것. 여성가족부 산하 청소년보호위원회가 자신의 음반에 대해 말도 안되고 무책임하며 창작자들을 짓밟는 것에 다름 아닌 황당한 심의를 진행했다는 것이다. 익히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노랫말에 등장하는 ‘술’이란 가사 때문이었는데 결국 그의 노래는 술을 언급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청소년 유해물로 지정되기에 이르렀다.

느닷없이 되돌아온 검열의 시대

이게 단 한 번의 사례라면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 몇 년 동안 <브로콜리너마저>, <보드카레인>과 같은 홍대씬의 밴드들은 물론 SM 소속의 가수들, 하하, 이승기에 이르기까지 이런 일을 반복적으로 당해 왔다. 최근에도 유명 아이돌의 노래들이 대거 청소년 유해물로 판정이 내려지고 말았는데 청소년 보호위원들의 활동 속도와 반경은 불만이 고조되고 있는 여론과 관계없이 점점 더 빨라지고 넓어지는 모양새다.

   
여성가족부 홈페이지
 
당연히 청소년 보호위원회의 청소년 유해물 판정을 둘러싼 논란은 거의 모든 언론을 통해 보도가 되었다. 하지만 이에 대해 도대체 말 같지도 않은 변명과 일관성 없는 이유로 대응하거나 혹은 ‘나는 내 길을 간다’ 식의 무시조로 일관하고 있으니 단순 사실 관계를 넘어 비판조로 기사를 내지 않는 언론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럼에도 그들의 고집과 맷집은 보통이 아니다. 지난 8월 5일에도 이들은 가요계를 향해 수류탄을 투척했다. 맞기 싫으면 알아서 자기검열을 하라는 식이었다. 머릿속 네 생각 중 어떤 부분은 잔말 말고 포기하라고. 특히 술, 담배 등은 언급도 하지 말라고.  
 
검열이라는 살풍경의 원흉, 여성가족부

그러나 술과 담배는 청소년들이 시청하는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에 등장한다. 우리 주변, 그러니까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형, 누나의 일상적인 생활과 멀지 않기 때문이다. 대통령을 비롯한 많은 권력자들이 한 데 모여 술잔을 들고 지구촌의 밝은 미래를 함께 기원한다는 이벤트도 TV를 통해 청소년들이 자주 접하게 되는 익숙한 모습이다. 하지만 청소년보호위원들은 이를 두고 ‘청소년 유해물’이라는 판정을 내린 적이 없다. 물론 그게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유독 노래에 대해서는 다른 잣대를 적용하고 있다. 노래에서는 ‘술’이란 가사가 나오면 곧바로 청소년 유해물로 판정되니 말이다. 이처럼 일관성 없는 심의위원들의 태도는 논란을 증폭시키는 사실상의 가장 주요한 원인이다. 창작의 세계에서 일관성 없이 자의적으로 진행되는 가치판단과 권력의 남용은 결국 검열의 어두운 그림자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검열이란 말 자체가 실질적으로 위헌적이며 민주주의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인 바, 특히 문화예술 영역에서는 가장 살풍경한 권력 남용의 상징이기도 하다.

“유신 폭압 통치 때도 이런 일은 없었다.”

웃기지도 않는 것은 따뜻함과 이해와 포용의 감성으로 시민들을 위한 정책을 펼쳐나가야 할 여성가족부가 거꾸로 검열의 산파로 맹활약하는 이 어이없는 현실이다. 이런 현실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요약하자면 대략 다음과 같다. “박정희의 유신 폭압 통치 때도 이런 일은 없었다.”는 것. 이는 남성에 대한 여성의 임금차별은 어느 나라보다도 심각하고 출산율은 세계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는 대한민국 여성가족부가 꼭 해야 할 일은 안 하고 쓸데없는 아니 그야말로 악의적인 일만 일삼고 있다는 이야기, 결국 시민들이 정부와 관료를 잘못 선출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결국 현재와 같이 여성가족부 및 그 산하 청소년보호위원들의 쓸 데 없는 활약이 지속되는 것은 우리 음악계의 수준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문화적 수준, 더 나아가 국격 자체를 심각하게 퇴보시키는 일이 분명하다. 이미 수많은 작가들의 머릿속에 자기 검열의 기제가 발동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 검열을 가르치는 것이야 말로 나라의 미래를 책임질 우리 청소년들에게 노출된 가장 맹독성 유해물이다.

곡필의 덫, 결국 제 자신의 발목을 겨누게 될 것

난을 칠 때, 어떻게 쳐야 하는가. 붓으로 획을 그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느낌이 온 대로 주저 없이 붓끝이 기운차게 흐르도록 하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 멋진 작품, 시대와 호흡하는 예술은 이렇게 해야 등장하는 것이다. 자유로운 영혼과 이상을 향하여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주저 없는 일필휘지(一筆揮之)를 날릴 수 있을 때 타인과의 참다운 대화가 시작되며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한 예술적 걸음이 내딛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일필휘지의 반대편에 곡학아세(曲學阿世)라는 말도 있다. 기운찬 붓끝 대신 이익과 기회만을 좇는 음습한 곡필(曲筆)이 춤을 추는 것, 그게 바로 곡학아세다. 곡필이 춤을 추고 시대를 희롱하는 일이 만연할 때 우리 젊은 세대는 암울한 미래와 맞닥뜨려야 한다. 그런데 곡필은 스스로 등장하지 않는다. 곡필을 만들어내는 어두운 힘, 그것이 바로 검열이다.

자유로운 세상을 인정하지 못하는 낡은 존재들이 검열이라는 덫을 놓게 되면 힘없는 예술인들 대다수는 결국 곡필을 선택하거나 아니면 아예 붓을 놓을 수밖에 없다. 밥을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그에 따라 사회의 문화적 수준도 함께 퇴보하게 마련이다. 21세기에 검열이 횡행하는 요즘 우리 사회의 모습이 꼭 그런 꼴이다. 하지만 역사가 증명하는 것은 단 하나. 곡필의 덫은, 결국 제 자신의 발목을 내리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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