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은 풀고 돈은 묶는다’ 개정 통합선거법에서 강조하고 있는 이번 6.27 전국 동시 지방선거의 대원칙이다.

개정 선거법의 규정에 따라 자원봉사자에게 일당을 준 선거 사무장이 구속되는가 하면 기자에게 금품을 건네준 출마자가 ‘이해유도 및 매수죄’로 구속되기도 했다.

그러나 여기에 커다란 허점이 하나 숨어 있다. 금권이 아닌 ‘관권개입’이라는 구시대의 망령이 곳곳에서 떠돌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관권개입은 소문만 무성했을뿐 그 실체를 확인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성격상 은밀히 추진될 수 밖에 없고 폭로될 경우 곧바로 사법처리와 연결될 뿐 아니라 전체 선거 분위기에 커다란 파문을 불러 일으키게 되는 민감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물증’을 찾아 여기저기 헤매고 다니는 기자에게 14일 밤 귀가 번쩍하는 정보가 들어왔다. 부산진구청 총무과장 곽모씨가 전날밤 서면 부근 술집에서 직선 구청장 출신인 하모 민자당후보의 지지발언을 하다 선관위에 고발당했다는 것이었다.

당장 확인취재에 들어갔다. 15일 아침 경찰서 사건 사고를 챙기고 구청에 잠깐 들른후 곧바로 선거관리위원회 사무실에 들러 고발 접수대장을 확인하고 사무국장 등에게 유도질문을 던졌으나 아무런 수확도 없었다.

오전 9시30분께 정면돌파를 위해 구청장 방에 찾아갔다. 소파에 앉자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입후보자 연설회 개최결과 여론’이라는 A4용지 2장짜리 문건이 눈에 번쩍 띄는게 아닌가. 전날 기자가 직접 취재했던 여당 후보의 연설회 총평과 미비점 개선대책 등이 일목요연하게 담겨져 있는 메가톤급 문건이었다.

평소 격의없이 지내던 구청장의 안색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아무 것도 아니다. 그냥 참고용으로 만들어봤을 뿐이다”라는 대답과 함께 기자가 보는 앞에서 문건을 찢어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쓰레기통에 넣는 것이었다. 일단 나왔다. 그러나 문제의 문건은 바로 그 쓰레기통을 통해 기자에게 입수됐다.

그날 밤 기자는 이틀치의 문건을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큰 종이위에 이어붙여 여러장 복사한 후 “관권개입이 물증을 통해 확인됐다”는 내용의 기사를 작성, 16일자 1면 머릿기사로 보도할 수 있었다.

파문은 엄청났다. 보도이후 4시간만에 구청장이 전격 직위해제되고 부산시장과 내무부장관의 ‘관권개입 엄단’ 지시가 잇따라 내려왔다.

보도이후 기자는 그러나 심한 갈등에 시달려야 했다. 전국적으로 광범위하게 추진되고 있을지도 모를 노골적인 관권개입 시도를 사전차단했다는 기자로서의 뿌듯함과 함께 가깝게 지내던 담당직원과 구청장 등이 처벌을 받게 된데 따른 인간으로서의 고뇌때문이었다.

사실상 관권개입은 정치논리에 따라 기초단체장에게까지 정당 공천을 허용하고, 직전 구청장들을 대거 여당 후보로 공천했을 때 이미 예고돼 있었던 것이나 다름없다. 지금까지의 관례에 비춰 “부산진구청이 재수없게 걸렸다”는 공직사회 내부의 자조어린 평가가 오히려 설득력을 얻고 있다.

부산진구청의 이번 관권개입 사건이 본격적인 지방자치 시대의 개막과 함께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을 정착시키는 촉매제가 됐으면 하는 것으로 자위를 삼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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