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의 논리’가 우리 언론을 깊숙이 지배하고 있다는 진단이 나온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과거 군사정권 시절 원시적 언론통제를 일삼았던 정치권력과는 달리, 이른바 ‘문민시대’를 맞아 급속도로 영향력을 확대해온 재벌은 한층 세련되고 효과적인 방법으로 언론을 통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삼성중공업과 기아자동차 사이에 불붙은 ‘산업스파이’논쟁과 관련된 보도는 우리 언론이 얼마나 재벌의 입김에 좌우되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각별한 관심을 끌고 있다.

경쟁업체 사업장, 그것도 출고장 근처에서 망원렌즈를 들고 최신형 제품을 촬영하던 삼성중공업 직원이 기아자동차의 경비직원에게 발각돼 필름을 압수당한 사건은 누가 보아도 ‘산업스파이’논란이 일만한 사실임에 틀림없다.

더구나 ‘초일류기업’을 자처하는 삼성은 과거에도 엘지전자 창원공장에서 냉장고 최신기술을 빼내려다 들켰는가하면, 한국중공업에서는 설비를 무단 촬영하여 산업스파이로 몰렸던 ‘전력’이 있다.

따라서 당연히 문제시 돼야할 이 사건이 우리 언론에서 철저히 묵살되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납득이 가지않는다. 더욱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은 삼성중공업 관련기사가 초판에는 출고돼 일부 신문의 경우 크게 취급됐으나 시내판에는 돌연 축소되고 심지어 아예 사라져버린 사실에 있다.

얼마전 중앙일보의 자사 홍보기사와 관련하여 재벌의 언론소유를 강도높게 비판하고 삼성 재벌의 비리를 폭로하는 기사로 일주일동안 지면을 도배질 했던 신문들도 1단으로 보도하거나 처음부터 기사를 싣지 않았다.

우리 언론들이 기사 가치판단에서 얼마나 이중잣대를 갖고 있으며 그 기준이 얼마나 천박한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남의 기술을 훔쳐 손쉽게 돈을 벌려는 재벌의 논리는 천민자본의 전형적인 행태에 지나지 않거니와 자본주의 경제질서가 지니고 있는 최소한의 ‘도덕성’마저도 짓밟는 범죄행위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충분한 혐의가 있는 ‘산업스파이’사건에 대해 대부분의 언론들이 침묵하거나 마지못해 1단기사로 보도하는 것은 우리 언론이 광고 수입에만 급급하여 자본주의 경제질서의 상식마저도 수용하지 못하는 천민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반증임이 분명하다.

문제의 삼성그룹은 이미 지난 3월에도 모 신문의 기사와 관련하여 그 신문에 예정됐던 광고를 빼겠다는 압력을 넣은 전력이있다.

이처럼 광고 의존도가 갈수록 심화되어 광고주 곧 자본의 논리에 따라 편집방향이 춤춘다면 이는 명백히 민주언론의 이상에 어긋남은 물론 언론자유의 상식마저 배반하는 일이 아닐수 없다.

더구나 과거 정치권력의 언론통제와는 달리 ‘자본’은 표면상으로 나타나지 않으면서도 결정적으로 편집방향을 좌우하는 ‘숨은 권력’이기에 더욱 세심한 경계가 필요하다. 천박한 상업주의 논리에 매몰돼 가는 한국언론의 개혁을 위해 언론계 안팎의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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