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독일 언론인 페터 프라갈씨는 구서독 언론인 출신으로 지금은 구동독 당기관지 <베를린 자이퉁>에서 논설위원으로 활약하고 있는 중견 언론인이다. 한국언론연구원이 ‘통일시대 언론의 역할과 과제’를 주제로 개최한 한·독 심포지엄 참석차 내한한 프라갈씨를 만나 통일전후 독일의 언론인 교류 상황 등에 대해 들어봤다.

― 통일이전부터 동독에서 활동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1972년 양국정부가 ‘기본조약’을 체결하면서 ‘상호간의 상주특파원을 교환한다’는 원칙에도 합의했습니다. 당시 남부독일신문(Suddeutshce Zeitung) 기자로 일하면서 뮌헨에 머무르고 있던 저는 74년 1월10일, 전국일간지 기자로선 처음으로 동독 특파원으로 파견됐습니다.”

― 당시 양국 언론인의 교류는 어느정도였습니까.

“초기엔 그렇게 활발히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서독에서 동독으로 파견된 특파원은 20여명 정도였고 동독에서 서독으로 파견된 특파원은 5명 정도였습니다.”

― 민간 언론인 차원의 교류는 없었습니까.

“양국 언론단체들과 같은 민간차원의 공식적인 교류는 없었습니다. 상호 파견된 특파원들이 개인적인 차원에서 움직임은 다소 있었지만요.”

― 동독취재활동에 제약은 없었는지.

“동독정부가 특파원들에게 취한 조치는 상당히 엄격한 것 이었습니다. 동독정부는 주민들에게 비판적인 얘기는 못하도록 하고 인터뷰에 응할 때에도 당국의 허가를 받도록 할 정도였습니다. 또 서독특파원이 동베를린을 24시간 이상 떠나지 못하도록 했죠.

제한된 지역외에 동독의 다른 지역을 취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이같은 내용의 ‘행동규칙’을 3번 이상 어길 경우 특파원 사무실을 폐쇄하기도 했죠.”

― 실제로 추방된 특파원은.

“네차례 정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슈피겔지 기자가 동독 어린이의 강제입양에 관한 뉴스를 내보냈다가 추방된 적이 있습니다. 또 제1독일 공영방송 특파원이 ‘국경을 감시하는 동독 군인들이 망명자들에게 마치 토끼사냥 하듯 사격을 가했다’는 보도를 한 뒤 추방당하기도 했죠.

저도 농촌지역 주민들이 물가가 너무 오른다며 항의시위를 했다는 보도를 한 뒤 동독 외무부로부터 한번만 더 이같은 ‘사실이 아닌’ 보도를 하면 추방하겠다는 경고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 통일이 선포된 90년 당시 어디에 있었나요.

“당시에도 슈테른이라는 잡지의 특파원으로 동베를린에 있었습니다. 바로그날 기자브리핑이 예정돼 있었죠. 기자들은 이 자리에서 ‘내일부터 서독으로의 여행이 자유롭게 됐다’는 동독정부측의 공식발표를 들었죠.

이같은 발표직후 베를린 장벽으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죠. 이후부터 수주동안 잠도 제대로 못자고 기사쓰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독일 통일이라는 역사적인 현장에 있었다는 것은 평생 잊지못할 경험입니다.”

― 통일을 바라보는 언론들의 시각은 어땠습니까.

“전반적으로 봐서 보수적인 신문들이 통일을 더 원했고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신문들은 조심스런 태도를 보였죠. 냉전체제에서 반공적인 논조를 보였던 신문들이 통일을 지향하는 입장이었고 긴장완화를 주장했던 신문들이 오히려 신중한 모습이었죠.

― 통일이후 언론의 주요 관심사는.

“우선 동독의 비밀경찰이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비밀경찰은 동독 성인 5명 가운데 1명이 포함될 정도로 광범위한 조직이었습니다. 다음은 정치지도자들 문제였죠. 동독주민들이 새롭게 얻은 ‘자유’를 어떻게 누리고 있나 하는 것도 주요한 관심사였죠. 여행하고, 서독에 와서 물건을 사는 모습들을 담아냈죠.”

― 최근 한국에서도 현직 언론인들의 남북교류 움직임이 있습니다.

“물론 민간차원의 교류도 중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에 앞서 정부 차원의 교류가 선행돼야 한다고 봅니다. 정치차원의 문제해결 노력이 우선적으로 이뤄져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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