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2사단에서 발생한 총기사고의 중간조사 결과가 발표됐다. 사고조사반에 따르면, 가해자 김 모 상병은 “구타, 왕따, 기수 열외는 없어져야 한다”고 진술했다. ‘기수열외’는 후임병이 선임병을 대접하지 않거나, 선임병이 후임병을 인정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 군대 내의 억압적 위계 구조가 이번 사건의 원인이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언론은 이번 사건에 대해 제 나름의 분석을 내놓았다. 가장 먼저 해병대와 군 당국이 도마 위에 올랐다. “해병부대는 나사가 풀려 있었다(동아일보)”거나 “‘동료 잡는’ 해병대로 전락했으니 이게 될 말인가(세계일보)”, “군의 기강해이와 형식적 대응이 낳은 일종의 ‘예고된 참사’(경향신문)”라는 식의 지탄이 이어졌다. 한겨레는 해병대의 강력한 전투력과 단결력 이면에 “일본 제국주의 군대 내무반을 방불케 하는 빗나간 조직문화가 도사리고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다”고 썼다. 총기 관리가 허술했다는 사실과 김 상병이 ‘관심사병’이었음에도 제대로 된 ‘조치’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이 비판의 대상이 됐다.

총기 관리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허술했다거나, 관심사병에 대한 ‘관심’이 부족했다는 점이야 당연히 비판을 받아 마땅한 사안이다. 관계자에 대한 문책과 철저한 재발방지 대책이 뒤따라야 한다는 사실에도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한 번 생각해보자. 과연 이번 사건이 ‘특이한 사건’인가? 사건이 발생한 해당 부대의 기강 해이와 가해자의 돌출행동으로만 이 사건을 설명할 수 있을까?

   
6일 오전, 경기도 성남 국군수도병원에서 이번 사고로 숨진 장병들의 영결식이 열렸다. ⓒ연합뉴스
 
군대 내 총기사고나 사병들 사이의 갈등, 가혹행위 등의 문제는 사실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군대라는 조직에 적응하지 못해 관심사병으로 간주되는 일군의 무리가 있다는 점도 전혀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해병대에만 이런 구조가, 해병대에만 관심사병이 있는 것도 아니다. 거의 모든 부대에는 군번에 따른 상명하복의 원리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움직이는 ‘군대 문화’가 있다. 여기에 적응하지 못하는 부적응자도 거의 모든 부대에 있다.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지, 군의 기강 해이 실태와 눈에 보이지 않는 관심사병의 존재는 군대에 다녀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공공연한 비밀이다. 보도되는 것보다 문제가 훨씬 깊고 심각하다는 것도 우리는 다 알고 있다. 우리 모두가 알고는 있지만, 말하기 불편했던 문제들이 이번 사건에서 극단적으로 드러났을 뿐이라는 뜻이다.

단지 ‘드러났다’는 이유로 이번 사건이 특별한 주목을 받는 것은 부당하다. 마치 어딘가 동떨어진 곳에서, ‘특수한’ 한 사병이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지른 것처럼 묘사하는 순간, 거의 모든 군부대 내에 존재하는 ‘비극의 씨앗’은 묻힌다. 기수 열외나 폭언, 구타 등 내무반에서 이뤄지는 가혹행위, 허술한 총기관리나 공공연한 근무지 이탈 등 군 문화 전반에 만연한 ‘적당주의’가 잊혀진다. 말하자면, 이번 사건에 놀라는‘척’ 하면서 호들갑을 떠는 언론과 우리는 모두 이 비극의 ‘공범’일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의무적으로 군대에 몸을 담게 되는 대한민국 남성은 두 가지 선택을 강요받는다. 적응할 것인지, 반항할 것인지. 그러나 개인의 힘으로 군대의 조직문화에 반항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사실상 한 가지의 선택을 강요받는 셈이다. 그렇게 대한민국 남성들은 권위에 복종하고, 불의와 타협하는 법, 비합리적 상황에 맞서기 보다는 포기하는 법을 배운다. 여기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적응하기를 거부하는 모두는 관심사병이 될 수밖에 없다. 가해자인 김 상병을 두둔하려는 게 아니라, 수많은 관심사병을 만들어내는 구조에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냐는 물음이다.

잠시 군대 담장 너머로 시선을 돌려 보자. ‘군대에 다녀와야 사람이 된다’는 말을 누구나 들어봤을 것이다. 이 말은 곧 ‘군대에 다녀와야 복종과 포기를 내면화할 수 있다’는 말과 같다. 다시 이 말을 조금 순화하면 ‘군대에 다녀와야 ‘사회생활’ 잘 하는 사람이 된다’는 말이 된다. 엄격한 위계질서와 상명하복의 원리는 군대뿐만이 아니라 많은 조직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고집불통인 상사와 ‘내리갈굼’으로 표현되는 일방적 의사소통 구조, 비민주적인 의사 결정 관행과 강요되는 복종의 문제는 비단 군대 내의 문제만은 아니다.

또 어디 그 뿐인가. 좀 더 넓게 보면 ‘권력에 의한 폭력’은 도처에 널려 있다. 생존권을 짓밟힌 노동자와 서민, 이들의 요구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힘 있는 사람들, 명백한 불의와 부조리에도 불구하고 ‘원래 사회(군대)란 그런 곳’이라고 합리화하려 애쓰는 우리들. 수많은 ‘부적응자’들을 타자화 하고 그들을 향해 쉽게 비난을 퍼붇는 우리 사회의 (뜨겁게 달아오르곤 하는) 차가운 시선은 또 어떤가. 어쩌면 우리 모두는 ‘해병대 2사단’에서, 드러나지 않은 수많은 ‘김 상병’들과 함께(또는 스스로가 김 상병이 되어)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말하면 너무 지나친 표현일까?

“일본 제국주의 군대 내무반을 방불케 하는 빗나간 조직문화”는 한겨레의 표현처럼 놀라워 할 일이 아니라, 사실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군 당국과 해병대만 탓할 것이 아니라, 우리 군대 전반에 퍼져있는 ‘비극의 씨앗’들, 더 나아가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전근대적 군사문화’를 탓해야 마땅한 일이다. 과연 관심사병을 ‘관리’하는 상담인력을 늘리고, 이들을 “체계적으로 관리(서울신문)”한다고 문제가 해결 될까. 입소 시에 이뤄지는 인성검사를 강화해 사전에 부적응 위험자를 걸러낸다고 해결될 일일까. 총기관리를 강화하고 인성교육을 강화한다고 해서 정말 문제가 사라질까.

어쩌면 우리는 늘 그렇듯, 이번에도 그럴듯한 희생양을 찾아 그(들)에게 화살을 돌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뻔하디 뻔한 ‘대책 아닌 대책’들을 이야기하면서 남의 문제가 아닌 바로 ‘우리의 문제’를 애써 회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언론과 우리의 ‘호들갑’이 불편하고,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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