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수신료 인상을 둘러싼 여야 공방 과정에서 불거진 민주당 대표실 도청 논란은 한 점 의혹 없이 그 진상이 규명돼야 한다. 민주당의 주장처럼 그 누군가가 민주당 대표실을 도청한 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국회를 유린한 불법행위다. 게다가 그 도청내용이 한나라당에 건네졌다면 누가 무슨 의도로 그랬는지도 명확하게 밝혀져야 할 것이다. 야당 대표실이 도청당하고, 그 도청내용이 집권당에 건네지는 상황은 과거 군사독재정권 때도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민주당은 대표실이 도청 당했다는 정황 증거로 먼저 한나라당 한선교 의원이 지난 24일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에서 공개한 이른바 ‘틀림없는 녹취록’ 내용을 들고 있다. 한선교 의원이 문방위에서 이른바 ‘녹취록’을 인용해 언급한 내용이 전날 민주당 대표실 회의 발언 내용을 거의 그대로 옮겨놓았다는 것이다. 한 의원이 이른바 ‘녹취록’을 들고 나왔던 당시에 민주당은 녹음 파일을 아직 풀지도 않았던 상태였으며, 최고위원과 문방위원, 그리고 당직자 3명만 참석한 회의였던 만큼 민주당에서 녹취록이 흘러나갔을 개연성은 전혀 없다고 단언했다.

한 신문사가 입수한 바에 따르면 한선교 의원이 공개한 문건은 민주당 대표실 연석회의 당시의 발언을 녹취 수준에서 풀어놓은 것이 분명해 보인다. ‘민주당 연석회의 발언록’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 문건은 A4 용지 7쪽으로 당시 회의에 참석했던 의원들의 발언 내용이 아주 구체적으로 구어체로 정리돼 있었다. 이 신문은 “이 문건에는 23일 민주당 비공개회의 내용이 거의 녹음 파일을 풀어놓은 수준으로 기록돼 있었다”고 했다. 한선교 의원이 “틀림없는 녹취록”이라고 말한 것만 봐도 이 문건이 거의 녹취록 수준이라는 데는 이의가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먼저 한나라당과 한선교 의원이 이 문건의 출처와 전달 경위에 대해 나름 설득력 있는 해명을 먼저 내놓아야 한다. 한 의원은 이 문건이 민주당에서 흘러나온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민주당 관계자가 회의 내용을 메모한 것을 제3자가 건네주었다는 것이다. 한 의원의 주장은 민주당의 주장과 정면으로 배치될 뿐만 아니라,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들다. 한 의원 주장대로라면 당시 회의에 참석했던 민주당 의원이나 당직자가 녹취내용을 제3자에게 제공해 한나라당에게 전달한 꼴이 된다.
 
이런 주장이 설득력을 갖자면 적어도 왜 민주당 관계자가 제3자를 통해 중요한 회의 내용을 한나라당에 흘렸는가 하는 ‘동기’ 정도는 분명해야 한다. 한나라당과 한 의원은 이에 대해 납득할만한 해명을 내놓지 않고 있다.

민주당의 의뢰로 경찰이 수사에 착수한 만큼 경찰 수사를 지켜봐야 하겠지만, 민주당 대표실 회의 내용이 고스란히 유출된 것과 관련해 민주당과 일부 언론이 ‘이해당사자’인 KBS 연루설을 제기하고 있는 것도 심상치 않다. KBS는 이에 대해 ‘억측’이라고 일축하고 있다.

공영방송인 KBS 관계자가 그런 일을 했으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만에 하나 그것이 사실로 드러난다면 KBS는 회복하기 힘든 타격을 받게 될 것이다. 물론 민주당도 확실한 근거 없이 KBS 연루설을 제기하는 것도 무책임하다. KBS 연루설을 언론에 제기하자면 그 근거를 분명하게 밝혀야 할 것이다. 일부 언론에 슬쩍 흘리는 식의 무책임한 의혹 제기는 되레 도청 의혹 사건의 진상 규명에 걸림돌이 될 뿐이다.

KBS는 설령 민주당 대표실 도청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고 하더라도 민주당에서 왜 이런 의심부터 하게 됐는지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 KBS는 그동안 수신료 인상을 위해 온갖 무리수를 두어왔다. 최근 국회 논의가 좌절될 기미를 보이자 국회 문방위원들과 김인규 사장이 출연하는 TV토론을 급조한 것이 대표적이다. 또 기자들을 동원해 국회의원들에게 직간접적인 로비를 해왔다는 것도 공공연한 사실이다. 전재희 문방위원장이 28일 민주당의 문방위 회의실 점거에 대해 KBS 국회 출입 선임기자에게 “민주당을 다 설득했다면서? 어떻게 설득했기에 상황이 이래요?”라고 힐난한 것이 그 분명한 증거다.

경찰은 의회정치의 근간을 위협하는 이번 도청 의혹 사건의 진상을 명쾌하게 규명해야 한다. 민주당은 물론 한나라당이나 KBS도 자신들에게 쏟아지고 있는 의혹의 해소를 위해서라도 경찰 수사에 적극 협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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