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과가 뭐입니까? 그 엄동설한에

수많은 양만들을 광주에 갔다가 반 수 이상 죽었어요.

백장군이 정치적으로 어떤 이유가 있는지 모르지만 사고가 많이 났어요.

전시니까 그렇지 지금 같으면 욕 많이 먹었을 것입니다"

공국진은 1946년 육군사관학교 제2기로 졸업하고 지리산지구 전투사령부 작전참모, 육군본부 군수국 차장, 백야전투사령부 작전참모, 제3사단 참모장 등을 거쳤으며 몇해전 숨졌다. ( )안은 편집자가 풀어 쓴 것이다. <편집자주>

제목 : 지리산지구 토벌작전
일시 : 1965년 6월 15일
장소 : 한일지업주식회사 사장실
대상자 : 공국진 (예 준장)
당시소속 : 지리산토벌사령부
계급 : 소령, 중령
군번 : 1017X
연령 :
출신기별 : 군영2기
직책 : 작전참모, 참모장
현직 및 소속 : 사장
면담자 : 유관종, 김백곤

<중략>
문 : 그 다음에 작전과장 그만 두시고 나간 것이 어디입니까?

답 : 1군단입니다. 돌아가신 김백일 장군이 1군단장때입니다.

문 : 1군단 직책이 뭐입니까?

답 : 작전참모로 갔습니다. 백장군 모시고 춘계 1차 2차 3차 4차 공세까지 겪고 그리고 지리산에 갔다가 그리고 그 것 끝나고 지리산 백대장하고 싸우고 헤어졌습니다.

문 : 왜 싸웠습니까?

답 : 나하고 그 분(백선엽)하고 충돌한 것이 다른 것이 아니고 백장군은 단기간 내에 여기에서 뿌리를 꼽(뽑)겠다고 하는 것인데, 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참모는 기술적인 분야에서 구상합니다. 거기에서 충돌하는 것입니다. 어떤 개인이나 정치적인 고려 때문에 당연히 얻을 수 있는 이익을 포기할 수 없다 이것이고 이 양반은 다소의 희생이 있더라도 자기의 구상을 맞추자는 데에 의견이 맞지 않는다 말이에요.
작전으로 말하면 포위권을 형성할 때까지가 일단계 작전이고 그 다음에 지리산을 양분해서 양 사단이 하는 데 지리산이 4개도 9개둔(군)입니다. 9개군 주민이 20만입니다. 이 양반은 이 안에 있는 것은 다 적이다. 광주에 포로수용소를 지었어요. 그래 가지고 공객(공격) 개시하면 아이들 부녀자들을 다 적을 만들고 포로해 오는 데 추럭(트럭)에 실고 광주까지 후송하면 다 얼어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국내전에서 동족상잔을 하고 있는데 다소 양민과 적을 가려 취급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이북 땅에 가서 8로군 토벌하는 것 하고 다름이 있느냐 했습니다. 그래서 나하고 싸운 것입니다.

양안을 가지고 옥신각신하다가 벤푸리트가 내려 왔어요. 상황을 듣고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러자 백장군도 동의했어요. 그런데 한 번 인정된 것을 가지고 그렇게 작명이 나서 가리반(가리방)을 긁는데 비행장에 나가 뒤집혔어요. 그 때 고문관이 천하에 나쁜 놈이 있어요. 그 놈이 백장군하고 좋아하는데 G-3(작전참모)가 괜히 그런다 하고 벤푸리트한테 일러 바쳤어요. 그러니까 백장군 소신대로 바꾸라 그래서 바뀌었어요.

좋소 나는 고만 간다 당신 혼자 하시오. 그래서 헤져 가지고 21연대로 갔어요. 결과가 뭐입니까? 그 엄동설한에 우리가 바-카(파커) 입고 희-타(히터) 해도 추운데 수많은 양만들을 광주에 갔다가 반 수 이상 죽었어요. 백장군 당신이 정치적으로 어떤 이유가 있는지 모르지만 성과가 늦드(더)라도 그렇게 해야지 이 추운 때에 광주에 갔(갖)다놓으면 그 양반들이 두고두고 한 평생 원망할 것입니다. 그 후에 내가 진의를 알았어요. 사고가 많이 났어요. 전시니까 그렇지 지금 같으면 욕 많이 먹었을 것입니다.

나로(도) 참모로서 잘못이 있지. 참모로서는 최선을 다해서 건의하면 되고 실패를 최소한으로 국한하는 것이 참모인데 그 작전의 작전참모로서 못 하겠다고 그렇게 해서 나왔습니다. 우리가 20일 걸리드(더)라도 백성을 보호하면서 전투를 해야지 성과위주로 하면 안된다. 작전 보좌관 보고 너가 해라 하고 나왔습니다. 송요찬도 반대했습니다. 최영희도 다 반대했습니다. 길이길이 두고 욕을 먹을텐데... (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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