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비역 대장 출신의 친일파 백선엽씨가 한국전쟁 당시 지리산 빨치산을 토벌하면서 무고한 양민마저 무차별적으로 포로 압송해 대다수가 수용소에서 얼어죽게 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KBS가 오는 24~25일 6.25 발발 61주년 특집 ‘전쟁과 군인’ 2부작을 통해 백선엽씨의 전투업적 등을 집중 조명하는 방송이 예정된 상태에서 나온 것이어서 주목된다.

한겨레는 이같은 군 관계자의 증언기록을 입수 22일자 기사로 실었다. 한겨레에 따르면,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현 군사편찬위원회)가 1960년대에 채록한 참전자들의 구술 증언 가운데에 1965년 6월 15일 한국지업㈜ 사장이었던 공국진 전 예비역 준장의 증언청취도 이뤄졌다.

공씨는 “(1군단) 작전참모로 갔습니다. 백(선엽) 장군 모시고 춘계, 1차, 2차, 3차, 4차 공세까지 겪고, 지리산으로 갔다가…백 대장하고 싸우고 헤어졌습니다”고 말했다.

   
한겨레 6월 22일자 2면
 
그 이유에 대해 공씨는 “지리산이 4개 도, 9개 군입니다. 9개 군 주민이 20만인데, 이 양반(백 장군)은 ‘이 안에 있는 것은 다 적이다’라 했고, 광주에 포로수용소를 지었어요. 그래서 (제가) ‘공격 개시하면 아이들, 부녀자들을 다 적을 만들고 포로로 오는데, 트럭에 싣고 광주까지 후송하면 다 얼어 죽을 것입니다. 국내전에서 동족상잔을 하고 있는데 다소 양민과 적을 가려 취급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이북 땅에 가서 8로군 토벌하는 것과 무슨 다름이 있느냐’(고) 했다”고 전했다.

그는 “엄동설한에 우리는 바-카 입고 히-타 해도 추운데 수많은 양민은 광주(포로수용소)에 갔다가 반수 이상 죽었어요”라며 “사고가 많이 났어요. 전시니까 그렇지 지금 같으면 욕 많이 먹었을 것입니다”라고 구술했다.

실제로 백씨가 당시 채택한 작전 이름이 ‘쥐잡기 작전’(Operation Rat Kill)이라고 한겨레는 전했다. 지리산을 포위해 토끼몰이를 하는 식으로 주민을 소개하고 먹을 것을 없애 고사시키는 방식이었으며 작전 성과는 좋았다고 한겨레는 보도했다. 51년 11월 시작된 토벌작전은 이듬해 초 사실상 완료됐다. 포로들과 주민들이 뒤섞여 수용된 광주포로수용소는 열악한 환경과 양민 수용으로 사회문제가 됐고,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1953년 해체됐다.

공국진씨는 “나도 참모로서 잘못이 있지. 참모로서 최선을 다해서 건의하면 되고, 실패를 최소한으로 국한하는 것이 참모(의 역할)인데, 그 작전의 작전참모로서 ‘못하겠다’ 그렇게 해서 나왔습니다”라며 “송요찬·최영희도 다 반대했습니다. 길이길이 두고 욕을 먹을 텐데…”라고 진술했다.

   
백선엽 현역 장성 때의 모습.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
 
이에 대해 백 장군의 견해를 듣고자 했으나, 백 장군을 수행하는 관계자가 “장군님이 연로해서 그런 인터뷰가 어렵다. 답변이 곤란하다”고 답했다고 한겨레는 밝혔다. 증언자인 공 전 장군은 몇 해 전 작고했다.

백씨는 지난 1992년 출간한 <실록 지리산>(고려원)에서 “지휘부의 지침과 달리, 말단 부대가 비행을 저지르고 허위보고로 무마하는 경우, 그것을 완전히 확인해 진위를 가리기란 참으로 어렵다”며 “당시로서는 내가 도저히 알 수 없는 일이겠지만 토벌부대의 총사령관으로서 나도 혹시라도 부하 장병의 비행으로 희생된 넋들이 있다면 그들의 명복을 빌고 싶은 심정”이라고 밝힌 적이 있다.

이밖에 백씨는 봉천의 만주군관학교 출신의 친일군인으로, 일제말기인 1943년부터 1945년 일제 패망시까지 조선 독립군 등을 잔인하게 때려잡던 ‘간도특설대’ 대원으로 복무한 바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백씨는 자신의 행위에 대해 역사에 아무런 사과와 사죄를 한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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