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쌀 제공 선박의 인공기 게양 문제로 경색조짐을 보이던 남북관계는 북한이 사건 발생 다음날인 지난달 30일 전금철 대외경제협력추진위원회 고문 명의의 공식 사과문을 보내옴으로써 일단 ‘순항’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일부 언론이 보여준 보도태도는 남북관계의 개선이라는 장기적 관점에서 볼때 신중치 못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북한에 제공되는 쌀 2천톤을 싣고 갔던 씨 아펙스호가 하역과정에서 북한측의 요구로 인공기를 강제 게양했다는 소식이 알려진 지난달 29일 조선 중앙 경향은 이를 주요기사 및 해설·사설로 다루면서 정부의 무력한 대응과 북측의 태도를 공격했다.

정부에 대해서는 쌀 문제와 관련한 그간의 교섭태도를 공격하면서 ‘쌀 제공원칙 자체의 재검토’를 요구했고 북측에 대해서는 ‘고의적인 합의사항 위반’이라고 집중성토했다.

이날 오후 4시 통일원 대변인 명의의 성명에서 “북측이 사과방지와 재발방지를 약속한 만큼 문제삼지 않겠다”던 정부도 이들 신문의 초판보도가 나간 직후 긴급하게 관계부처 협의를 갖고 “쌀회담 북측 책임자인 전금철 대외경제협력추진위원회 고문이 공식 사과를 하지 않을 경우 쌀 제공을 중단하겠다”는 강경 입장으로 선회했다.

통일원 출입기자들은 “정부의 강경입장 선회 배경에는 언론보도가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언론보도가 정부 대북정책에 끼치는 영향력의 정도를 알게 해준 사례다.언론이 정부 정책에 영향력을 미치는 것은 당연하고 또 그래야 한다. 문제는 이 영향력이 바람직하게 행사됐는가 하는 점이다.

이번 보도의 주요한 초점은 인공기 게양의 고의성 여부다. 북한이 남측을 시험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태극기를 내리고 인공기를 강제로 게양하게 했다면 이는 심각한 문제다. 그러나 북측의 사과대로 ‘실무적인 착오’ 내지 ‘통신상의 문제에 따른 실수’였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규탄과 성토에 앞서 이를 판단하기 위한 접근이 필요했다. 사실에 대한 접근이 우선했어야 했다는 것이다. 북한이 실무선인 삼천리공사를 통해 이례적으로 신속하게 사과 의사를 밝혀온 것도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었다.

이 인공기 게양의 고의성 여부에 대한 진위는 아직 불분명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북한이 그간의 남북관계에서 그토록 기피했던 ‘책임있는 당국자’의 사과를 단 하룻만에 밝힌 점이다. 북한은 우리 정부가 지난달 29일 “삼천리공사의 사과만으론 곤란하다”는 입장을 밝히자 다음날 바로 전금철고문 명의의 공식 사과문을 보내왔다. 북한이 쌀회담 자체를 깰 의사는 없었다는 반증이다. 그런 점에서 처음부터 북한이 ‘고의적으로 일으킨 사건’으로 몰고간 이들 언론의 보도 태도는 확실히 성급했다.

남북관계의 개선이라는 ‘장기적 국익’을 고려한 논조 설정이 필요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끼니거리도 해결못해 쌀을 제공받는 처지에서 감히”라는 체제우월론적 접근 방식보다는 쌀문제를 통일의 물꼬를 트는 ‘돌파구’로 활용하려는 관점이 시대흐름에 맞다는 것이다. 국민들이 쌀문제 타결에 박수를 쳤던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인공기 게양 사건에 분노한 국민들이 있는 반면 쌀 제공을 하지 않느니만 못한 ‘남북간의 새로운 대치관계’가 조성되는 것을 우려하는 국민들 또한 적지않음을 감안했어야 했다.

언론의 대북보도가 얼마나 많은 변수들을 깊이있게 고려해야 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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