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어느날. 일이 밀려 뒤늦게 논에 거름을 뿌렸다. 곧 있을 모심기 전 미리 해 놓아야할 작업이다. 천평 논에 20kg 들이 퇴비 75푸대를 뿌렸다. 손으로 져 날라 뿌렸다. 논을 갈아엎고 물을 댄 논에서 첨벙첨벙 일하다 보니 옷은 흙투성이가 됐다. 일 마치고 상가집을 다녀와야 해서 미리 준비해 간 옷으로 갈아입고 문상을 갔다. 문상 마치고 나왔는데 한 동료의 신발이 없어졌다. 몇번 기다리고 찾아봐도 없는지라 그의 표정이 곱지 않게 됐다.

나도 모임에 갔다가 신발을 잃어버린 적이 있는데 그런 일을 당하면 참 곤란하고 맘 언짢기
그지 없다. 저녁 늦게 어디가서 신발을 살 수도 없는 노릇이고. 
 
“다른거 하나 신고 오면 돼잖아유.”

상갓집 슬리퍼를 끌고 있는 그에게 내가 말했다. 그는 또다시 신발 찾으러 들어갔다. 얼마후 다시 나왔다. 그는 여전히 슬리퍼를 신은 채 였다. 그는 그대로 문상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다.
 

   
5월의 모 ⓒ정혁기
 
다음날이었다. 일 마치고 점심 먹으러 가는 길에 다른 얘기중 우연히 그 일이 입에 올랐다.
 
“어제 보니 양심적이데유. 나 같으면 다른 신발 신고 나왔을 텐데유”
 
입방아를 냈다. 1톤 작업 트럭이 논길을 달리고 있었다. 말이 이어졌다. 다시 또 한 사람이 말했다.

“왜 넘 슬리퍼 신고 나왔어유? 맨발로 나와야지.”
“맞어 그 슬리퍼 장례식장 거 잖아유. 자기 것도 아닌데 장례식장 거를 왜 신고와유.”
“그사람 참 몹쓸 사람이네~ 넘에 슬리퍼를 신고오고.”
“...”
 
함께 웃었다.
 
5월은 생명력이 왕성한 달이다. 초목, 곡식, 철새, 곤충, 벌레 말할 것 없이 뭇생명이 있는 힘을 다해 몸을 키운다. 이른 봄에 피던 꽃도 싸목싸목 시들어가고 그 자리를 산야의 들꽃이 이어 피면서 자연풍광이 어지러울만큼 화려하게 펼쳐진다. 4월 하순 곡우가 지나 5월초가 입하였으니 철은 진즉 여름으로 들어섰다. 칙칙한 무거운 옷을 버리고 반팔 반바지 옷이 등장하고 여인들의 옷차림이 철을 앞지른다.
 
농사도 바쁘다. 땅내를 맡은 작물들이 쑥쑥 자라오르는 것을 잡초가 싸워 이겨가니 김매고 북주기를 부지런히 해가야 하고 잘 자라도록 마음 써야 한다. 논 모내기도 때맞춰 차근차근 준비해놓아야 한다. 논 갈아놓고 규산질 비료와 퇴비 뿌리고 모 물관리를 매일 해준다. 병해 충해 발생도 시작돼 예방관리를 시작해야 한다. 5월은 어느 때보다 땅위로 올라선 생명들의 자라오르는 힘이 무지막지 센 철이다. 5월의 자연은 누군가 마치 센 입김으로 풍선 불어 팽창시키듯 풍만해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5월이 되면 비도 잦다. 지난 9일에는 오후 늦게 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3일을 줄창 쏟아졌다. 3~4월의 비는 봄비라 하여 사람들의 심지와 정서를 적시고, 시와 노래의 주제가 된다. 라디오에서도 때 맞춰 봄비를 주제로 감미로운 대중가요 가락이 흘러나온다. 무엇보다 봄비는 땅을 스며들어 적시며 겨우내 언 땅을 녹인다. 그러나 5월에 내리는 비는 대접을 못 받는 것 같다. 사람들에겐 이미 봄맛이 안나고 농민들에겐 자주 오거나 많이 오면 농사 일정이 꼬이고 늘어지기 때문인 것 같다.

비오는 날에는 비닐하우스 안에서 일한다. 볏짚 깔고 풀 메고 물 주고 고추말뚝 박고, 비가 잠시 약해지면 삽자루 들처메고 물골 살피러 나가기도 하고. 하우스가 1천평인데 고추, 감자, 채소류를 심었다. 비오는 날 비닐 하우스내 작업은 특별한 감성을 불러 일으킨다. 하우스 내 작업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비오는 소리 들으며 비 내리는 오는 들녘을 내다보면 맑은 날과 다른 즐거움이 없진 않다. 비는 하우스 비닐을 두드리듯 쏟아진다. 그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비닐에 부딪치기 때문이다. 약하게 내린 비도 하우스에서는 큰비 오는것처럼 들린다. 비는 얇은 비닐을 두드려 진동을 일으킨다.

바람과 함께 몰아치는 풍우는 파동을 치듯 하우스 지붕을 두드리며 달려간다. 그 소리가 마치 실내 음악당에서 감동적인 공연을 듣고 관객이 치는 박수갈채 소리 같다. 계속 이어지는 박수소리. 우렁찼다가 약해졌다가 다시 되살아 나는 빗소리가 경기장의 박수소리 처럼도 들린다. 그런 소리를 들으며 일하다 보면 이생각 저생각 이어진다. 비소리가 머리를 두드리는 것 같다.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이 또 벌어진다. 농민들이 배추밭 모판 갈아엎는다는 기사, 사진, 영상이 뉴스가 됐다. 시장 가격이 떨어져 농사 원가도 안되기 때문이다. 농산물 가격이 폭락하면 운임비는 고사하고 포장 박스값도 안 나온다. 돌이켜 보면 수확기 일어나는 농산물 폭락은 농촌이 치르는 연례 행사다. 가격 지지가 안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난 시절 쇠고기 수입개방으로 소를 거리로 몰고 나오고, 양파, 배추를 갈아엎고, 아스팔트 광장에 쌀을 뿌렸다. 시위였다. 스스로 지은 곡물, 애써 기르는 동물을 뿌리고 내몰고 나오는 것이 좋은 일은 아니다. 오죽 하면 저러랴 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 일이 모습은 바뀌지만 지금도 벌어진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이 시장에서 가격이 움직이는 대로 결정되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애호박 ⓒ정혁기
 
이 나라에서 농사지어 먹고 살기 힘들다고 만나는 사람마다 같은 말이다. 특히 벼농사 지어서는 더 그렇다. 논 만평 지어도 조수익 2∼3000만 원 선이다. 중·소농은 더욱이 뾰족한 묘방이 나오지 않는다. 농업은 상시적인 공황상태다. 그래서 갈수록 농사 포기가 늘어가 농촌에 사람이 줄어간다.

근래 논은 밭으로 바뀌어간다. 논이 수익이 안되니 밭으로 전환해 과수나 밭작물을 짓는다. 현재 쌀 생산만은 남한 국민이 먹을 만큼의 자급자족 수준인데 수입쌀이 밀려 들어와서 생산을 줄여야 하는 상황이 이어진 결과다. 논농사 대신 밭작물 수익이 좀더 나으니 전환하지만 그 역시 소득 맞추기가 쉽지 않다. 경쟁도 심하다. 생산이 많으면 가격이 떨어지고 적으면 또 가격을 떨어뜨리기 위해 수입한다. 논을 줄이고 밭으로 가면 그 역시 바람직한 현상이 아닐 것이다. 세끼 뱃속을 채우는 주곡이 쌀 농사인데 벼농사 지어 살기 힘들다는 게 어찌 제대로 된 모습인가.
 
때는 논농사 모내기 철로 접어들었다. 언제부터 인가 모내기는 농촌만의 일이 되었다. 쌀의 갈 길이 어디인가. 우린 ‘소로리 볍씨’로부터 본다면 일만오천 년을 이어온 벼의 역사를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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