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숙 전 국무총리에게 9억여 원의 불법정치자금을 건넸다고 지난해 4월 검찰에 진술했다가 같은 해 12월 법정에서 번복한 한만호(50·수감중) 전 한신건영 대표가 애초의 진술은 거짓이었다고 13일 재차 강조했다.

아울러 검찰 조사 직후 자신의 허위 진술 내용이 특정언론에 잇달아 보도된 것과 관련해 "진술 내용을 누구에게 알려준 적이 없다. 기사를 볼 때마다 가슴이 철렁했다"고 말했다.

한 전 대표는 이날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25부(부장 조원철)의 심리로 열린 한 전 총리 명예훼손 손해배상 소송에 증인으로 출석해 당시 동아일보 기사와 관련한 심경을 토로하며 이와 같이 밝혔다.

지난해 4월 대한민국과 동아일보사를 상대로 피의사실 공표관련 명예훼손 손배소를 낸 한 전 총리 쪽은 "동아일보 기사에 적시된 한 전 총리 관련 피의사실은 검찰만이 알려줄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 전 총리 쪽의 논거는 이렇다. 동아일보 쪽이 답변서 등을 통해 밝힌 것과 달리 동아일보 기사에만 전달 금액과 전달 횟수가 구체적으로 적시됐다는 것이다.

동아일보의 2010년 4월 9일자 1면 기사 <"한 전 총리, 건설시행사서 9억 받은 혐의"> 보도 이전 여타 언론사들은 '거액'이나 '약 10억 원', '10억 원대, '10억 원 가까운 돈', '10억 원'으로 보도하는데 그쳤고, 전달 횟수도 구체적으로 적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 동아일보 2010년 4월9일자 1면.
 
반면 동아일보는 9일자에서 '9억 여 원'이라는 전달 금액과 '2007년 1∼4월에 한두 차례, 9∼10월에 한두 차례 등 서너 차례'라는 전달 횟수를 적시했다. 이 보도 이후에도 타사들은 '9억 원에서 10억 원'이라거나 '9억 여 원'이라고 보도했지만, 여전히 구체적인 전달 횟수는 보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동아일보는 이로부터 나흘 뒤인 4월 13일자 단독기사 <"2007년 3, 4, 8월 세 차례 한 전 총리 집 찾아 9억 전달">에서 "한씨는 또 한 전 총리에게 9억여 원을 전달한 시점은 2007년 3, 4, 8월 세 차례라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고 보도했다.

당시 검찰의 진술서 및 조서에 따르면, 한 전 대표는 4월 4일 공소 내용을 추상적으로 진술한 뒤 이튿날인 5일 한 전 총리에게 9억 원을 3∼4차례 걸쳐 전달한 것으로 진술했다. 8일에는 한 전 총리에게 3월, 4월, 8∼9월 3차례에 걸쳐 9억 원을 건넸다고 진술했다.

당시 한 전 대표 외에 전 한신건영 경리부장인 정모씨도 참고인 조사를 받았는데, 정 전 부장은 4월 5일 한 전 총리에게 전달한 금액이 5억 원인 것으로 진술했다가 이튿날 9억 원으로 정정한 것으로 나와 있다.

이 때문에 △검찰 △한 전 대표 △정 전 부장 이 셋 외에는 금액(9억 원)과 횟수(3차례)를 알 수 없으며, 특히 추후 금액을 정정한데다가 횟수도 진술하지 않은 정 전 부장을 제외하면 검찰과 한 전 대표밖에 남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게다가 한 전 대표는 복역 중이었다는 것이다.

13일 한 전 대표는 한 전 총리 변호인의 질문에 "4월 1일 첫 조사 이후 3일까지 부인하다가 제보자 남모씨의 겁박으로 (한 전 총리 쪽에 돈을 건넸다고) 4일 진술서를 썼다"며 "5일 1차 조서, 8일 2차 조서 작성 시 9억 원을 줬다고 허위로 진술한 것은 사실"이라고 답했다. 한 전 대표는 "진술 내용을 누구에게 알려주거나 제보한 적이 없다. 그럴 형편도 안됐다"며 "정 전 부장에게 그러라고 시킨 적도 없다"고 말했다.

'중앙지검 검사실이나 조사실에서 조사받을 때 언론사 기자가 출입한 것을 본적이 있는가'라는 질문에는 "기자라는 느낌이 드는 분이 두서너 명 들락날락했다. 나를 유심히 쳐다보기에 기억이 나는데, 확신은 못 하겠다"고 답했다. 

'동아일보에 기사가 계속 나갔는데 어떻게 이런 내용이 보도될 수 있다고 생각하나'라는 질문에는 "(당시 조사받을 때) 검사실이나 구치소에 동아일보가 항상 있어서 내용은 알 수 있었는데, (어떻게 진술 내용이 보도됐는지는) 지금도 의문이다"라고 답했다.

   
▲ 동아일보 2010년 4월13일자 12면.
 
반대신문에서 검찰 쪽 변호인은 "기자라는 느낌을 받은 이유가 뭔가", "그들이 무슨 얘기를 했나"를 물었다. 이에 한 전 대표는 "그들이 다시 나갈 때 검사님과 수사관님이 배웅하는 것을 보고 추측했다"고 답했다. 그들이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했다.

동아일보 쪽 변호인은 한 전 대표가 동아일보 기사를 읽었다면 언제 어디서 읽은 것인지, 당시 읽은 사실 자체는 과연 있는지를 묻는 모습이었다. 아울러 왜 당시의 여러 언론보도 중 유독 동아일보 기사만을 기억하는 지, 다른 언론보도와 확실히 구별할 수 있는 지를 물었다.

한 전 대표는 "4월초 검사실에서 동아일보를 읽은 것은 기억나는데 다른 신문들도 거기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검사님과 같은 뜻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에 4월 중순 독거방으로 옮기면서 동아일보 구독 신청을 했고 지금도 보고 있다"고 답했다. 그는 이어 "동아일보를 왜 기억하냐면, 동아일보에서 (검찰에 진술한 직후) 그때그때마다 (기사를) 실어줘 제목을 보고 가슴이 철렁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앞서 지난 1월 19일 심리에서 '검찰이 수사상황과 관련해 기자들에게 언질을 준 것 아닌가'라는 재판부 질문에 검찰 쪽 변호인은 "(기자들의) 추정이다"라고 답한 바 있다. 당시 동아일보 쪽 변호인은 "4월 8일 첫 보도(<검찰, 한 전 총리 새로운 혐의 수사)는 '별도 수사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고 썼다", "다른 언론사도 보도했다"고 반박했었다.

한편 한 전 대표는 "한 전 총리에게 어떠한 정치자금도 제공한 사실이 없다"며 "'추가로 기소될 수 있다'는 제보자의 겁박에다가, 빼앗긴 회사를 찾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허위로 진술한 것"이라고 진술 번복이 옳았음을 재차 강조했다. 이날 한 전 대표의 증인 신문만 한 재판부는 다음달 4일 오전 속행하기로 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 한 전 총리 등 거물 정치인뿐만 아니라 일반사건에서도 고질적으로 반복되는 피의사실공표는 형법 126조에서 금지하고 있는 범죄다. 검찰, 경찰, 기타 범죄수사에 관한 직무를 행하는 자 또는 이를 감독하거나 보조하는 자가 그 직무를 행하면서 얻은 피의사실을 공판청구 전에 공표하면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5년 이하의 자격정지에 처하도록 돼 있다.

그러나 지난해까지 10년동안 피의사실공표죄와 관련된 고소·고발이 202건이나 접수됐지만, 단 1건도 처벌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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