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통령이 위기에 빠졌을 때 청와대 입장에서 참 고마운(?) 역할을 하는 구원투수는 누가 뭐래도 ‘언론’이다. 청와대는 동남권 신공항 백지화라는 ‘대형 악재’를 맞이했지만, 언론의 출구전략은 이번에도 힘을 발휘했다. 여론의 흐름을 유도하는 힘, 그것은 언론이 지닌 고유의 능력이자 힘이다.

동남권 신공항 입지는 대구 경북 쪽에서 강하게 요구하는 경남 밀양과 부산 쪽에서 강하게 요구하는 부산 가덕도로 첨예하게 맞선 상황이었다. 이명박 정부가 특정 지역을 낙점할 경우 탈락한 지역의 거센 후폭퐁에 직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영남의 한복판에서 이명박 정부 반대의 물결이 탄력을 받는다면 여간 난감한 상황이 아니다. 게다가 이 문제는 내년 총선과 대선까지 영향을 줄 수밖에 없는 대단히 민감한 사안이다.

   
이명박 대통령(사진 왼쪽)과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연합뉴스
 
이명박 정부는 연이은 ‘실기’로 논란을 자초했다. 어떤 판단을 내리건 지역 주민과 국민 여론의 동의를 구할 수 있는 준비작업과 검증작업 등을 인내력을 갖고 냉정하면서도 철저하게 진행된 이후에 판단을 내렸어야 했다.

이번에 서둘러서 판단을 내렸지만, 그것이 영남권 주민들의 동의를 구할 만큼 충분한 준비 끝에 나온 결론인지는 의문이다. 이명박 정부는 동남권 신공항 백지화를 넘어서 부산 가덕도와 경남 밀양 양쪽 입지 모두를 향해 ‘낙제점’을 안겼다.

지역 주민들에게 상실감을 안긴 것을 넘어 ‘확인사살’을 한 셈이다. 이런 선택을 했으니 지역 여론은 부글부글 끓을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영남권의 반발을 누를 ‘명분’, 바로 그것이다. 국민 여론이 이명박 정부 선택에 힘을 실어준다면 영남권 반발을 헤쳐나갈 길을 찾을 수도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정치적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구원투수로 나온 주체는 다름 아닌 언론이다. 방송사는 대놓고 정부논리를 전파하는 데 앞장섰고, 주요 보수신문은 이명박 대통령을 비판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결과적으로는 출구전략의 길을 열어주는 역할을 했다.

KBS는 정부가 백지화를 발표했던 3월 30일 ‘뉴스9’를 통해 <[긴급점검] 국책사업 결정, 자칫하면 적자 허덕>이라는 말 그대로 긴급 뉴스를 전했다. 제목을 액면 그대로 받아드리면 이명박 정부의 결단으로 자칫하면 적자에 허덕일 수 있는 국책사업을 막아낸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정말 그런 것이라면 정부의 선택은 평가를 받을 수도 있다. 정말 그런 것일까. 그것이 원인일까. 동남권 신공항이 천문학적인 예산이 드는 비효율적인 국책사업이라는 논리는 보수신문들이 최근 힘을 싣고 있는 논리이다.

조선일보는 31일자 2면 <“10조 들여 지어봤자 적자 뻔하다”…3개 평가분야 모두 과락>이라는 기사를 통해 “공항을 지어봐야 고객이 별로 없어 적자를 피할 수 없는 것으로 결론난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정부의 입지 평가단이 그런 결론을 내렸다는데 그런데도 동남권 신공항을 건설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지역 이기주의’와 다름없다는 뉘앙스가 담겨 있다. 정말로 부산과 대구 쪽을 중심으로 영남권 주민들의 주장은 지역 이기주의일까. 냉정한 평가와 검증이 필요한 대목이다.

적어도 조선일보를 비롯한 주요 보수신문들이 내세운 논리는 그렇다. 전국에 있는 적자덩어리 공항과 동남권 신공항을 동격으로 놓고 여론을 몰아가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에게 비판적인 이들도 이번 결정은 잘한 것이라고 판단하도록 ‘논리’를 제공해주고 있다.

청와대 입장에서는 참으로 고마운 장면이다. 국무총리가 나서고 이제는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대국민 사과 입장을 밝혀야 하는 상황에서 언론이, 그것도 힘 있는 언론이 ‘출구전략’을 마련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명박 대통령과 이명박 정부는 정말로 어려운 결단을 한 것일까. 아니면 정치적 셈법에 따라 ‘덜 욕먹는 길’을 선택한 것일까. 대통령의 약속이라는 중요한 가치는 이렇게 뒷전에 놓여도 되는 것일까. 사실 동남권 신공항 문제는 따져야 할 잣대가 하나 둘이 아니다.

서울을 지역기반으로 하고 있는 언론의 부정적 기류가 어쩌면 지역균형발전에 대한 냉소적 시선 때문은 아닌지도 따져볼 대목이다. KBS와 보수신문이 출구전략의 길을 열어 나가면서 이명박 대통령이 ‘반전의 계기’를 마련한 것처럼 보였는데 중대한 변수가 생겼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이명박 정부의 선택과 180도 다른 주장을 펼치고 나선 것이다. 박근혜 전 대표는 정부의 백지화 결정에 대해 “이번 결정은 국민과의 약속을 어긴 것이라 유감스럽다. 지금 당장은 경제성이 없다지만 미래에는 분명 필요할 것이라고 저는 확신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근혜 전 대표는 “입지평가 위원장도 장기적으로 우리나라 남부권에 신공항이 필요하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게 바로 미래에 국익이라고 생각한다”면서 “제 입장은 이것은 계속 추진해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박근혜 전 대표는 동남권 신공항은 ‘예산 먹는 골칫덩어리’가 아니라 ‘미래의 국익’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논리는 이명박 정부의 주장이나 대통령 출구전략을 마련해준 보수언론의 논리와 배치된다. 한쪽은 동남권 신공항은 백지화가 맞다고 주장하고 다른 한쪽은 동남권 신공항은 꼭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수신문이 자기 논리에 충실하려면 박근혜 전 대표의 주장을 비판해야 옳다. 그 논리의 문제점을 지적해야 옳다. 그러나 문제는 대상이 박근혜 전 대표라는 점이다. 차기 대통령 선거에서 여권의 유력한 주자인 박근혜 전 대표에 대해 언론의 비판의 잣대를 들이댈 수 있을지는 참으로 흥미로운 관전 포인트다.

박근혜 전 대표는 언론의 ‘MB 출구전략’에 급브레이크를 걸었지만, 언론은 그런 박근혜 전 대표를 긍정적으로 포장해줄지도 모르겠다. 논리적으로는 앞뒤가 맞지 않는 모습일 수도 있지만, 벌써부터 그런 조짐이 보이고 있다.

연합뉴스는 31일 오후 인터넷 사이트 메인 뉴스로 <박근혜 ‘신뢰정치’ 카드로 대항…파장 예고>라는 기사를 실었다. <신뢰정치>라는 제목을 뽑으면서 박근혜 전 대표의 선택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동남권 신공항을 적자에 허덕이는 공항으로 몰아갔던 보수언론들은 동남권 신공항의 필요성을 강하게 부르짖는 박근혜 전 대표의 선택을 비판할까, 아니면 ‘신뢰정치’를 실천한 정치인으로 띄워줄까. 흥미로운 관전 포인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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