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보처가 14일 발표한 ‘선진방송 5개년 계획안’은 인력·프로그램 등 제작능력을 고려하지 않은 원칙없는 방송채널의 무제한적인 허가, 무리한 추진 일정, 방송의 정치적 독립성을 담보할 제도적 장치의 미비 등 상당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공보처는 방송의 공익성과 경쟁력 강화라는 ‘두마리 토끼’를 동시에 쫓겠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공익성 강화는 명분으로만 내세운 인상이 짙다. 경쟁력 강화를 위한 대책은 있지만 공익성 강화를 위한 구체적인 방안은 제시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여론수렴 과정에서도 방송위원회의 총괄기구화, 방송위원 및 KBS, MBC 이사진 구성방식의 개선, 교육방송 독립기구화, 공익자금제도의 근본적 개선 등 그간의 논의과정에서 모아진 방송계의 ‘일반적 합의’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공존’이 아니라 ‘공멸’ 올 수도

공보처의 계획대로라면 97년 이후 전체적으로 60~70개 채널이 무한경쟁을 벌이게 된다. 30여개의 케이블TV 채널에 지역민방 10~15개, 위성채널 10여개 이상이 안방에 쏟아져 들어오는 것이다. 여기에 기존 방송사가 97년부터 종일방송을 시작하게 되면 경쟁의 양상은 더욱 치열해질 전망이다. 최근 신문사간의 경쟁은 아무것도 아닌 ‘전쟁’에 버금가는 생존경쟁이 벌어질 것이 분명하다.

문제는 프로그램과 광고다. 공보처는 채널의 전면허용 근거로 방송의 국제경쟁력 강화와 시청자들의 채널선택권 확대를 들고 있다. 그러나 양질의 프로그램이 공급되지 않는 채널 증가는 ‘모래위의 성’에 불과하다. 잘못하면 ‘길은 우리가 닦고 프로그램 등 알맹이는 외국의 거대 방송사가 차지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고 방송전문가들은 우려하고 있다.

외국의 값싼 저질 오락 영상물의 범람과 재방위주의 편성, ‘적은 돈을 들여 빨리 만드는’ 부실 프로그램이 양산될 가능성도 높다.

케이블TV의 경우 시작한지 5개월도 안됐지만 프로그램 저질화 시비에 휘말려 있는 실정이다. 그만큼 프로그램 제작 능력이 떨어져 있다는 반증이다. 외국 프로그램의 방영 비율도 프로그램 공급업자들의 요구에 따라 20%가량 늘려줄 정도로 제작능력이 취약하다. 광고사정도 여의치 않아 상당수 프로그램 공급업체와 종합유선방송국이 도산위기 직전까지 내몰려 있다.

이런 상태에서 기존 지상파 방송의 종일방송을 허가하고 지역민방도 중소도시까지 허용하겠다는 것은 무리다. 위성방송도 마찬가지다.

공보처는 위성방송과 관련, ‘전면실시’를 주장하는 정보통신부와 논쟁을 벌이면서 프로그램 공급 능력과 인력부족 등 방송의 하부구조가 미비하다며 ‘단계실시’를 주장했다.

그런데 이제와서 지역민방도 허가하고 종일방송도 실시하겠다는 ‘자기모순’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공급할 프로그램이나 전문인력을 어떻게 채울 것인지에 대해서는 지상파 방송의 외주비율을 확대하고 케이블TV 프로그램 공급업체의 자체 제작비율을 확대하겠다는 지극히 ‘원론적인’ 수준의 대책밖에 내놓지 못하고 있다.

외국의 경우 새로운 매체가 등장하면 기존 매체의 채널 증가는 최대한 억제하는 정책을 취하고 있다. 그런데 공보처는 케이블TV가 안정은 고사하고 생존조차 불투명한 상태에서 ‘강력한 경쟁자’를 하나 둘씩 늘리고 있는 것이다. 공존이 아니라 공멸하는 사태가 오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지상파 방송의 종일방송이 시작되면 그 타격은 우선 낮방송을 위주로 하는 케이블TV에 가장 심각하게 미칠 것으로 보인다. 광고수입의 차질, 가입자 확보의 어려움으로 현실화될 것이다. 시청자나 광고주 모두 지상파 방송을 선호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같은 채널간 경쟁의 끝은 ‘규모의 경제’라는 이름하에 대기업 등 거대자본이 방송시장을 장악하는 것으로 마무리 될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도 나오고 있다.

규제는 완화 통제구조는 그대로

김영삼정부 등장 후 방송구조에 관한 논의는 주로 정치적 독립 확보 등 공정성 문제와 ‘다채널 다매체 시대’의 도래에 따른 경쟁력 확보라는 두가지 축을 중심으로 이뤄져왔다. 특히 공영성과 경쟁력이라는 서로 상반된 개념을 방송구조 개편 과정에서 어떻게 조화있게 추구할 것인지가 관건이었다.

그러나 이번 선진방송 5개년 계획안에는 이 두가지 중심축 중 공정성 문제는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우선 공정성 문제와 관련한 핵심 논의였던 방송위원회와 지상파 방송의 경영진에 대한 ‘인사독립’이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방송위원회의 경우 위원구성 방식의 민주적 개선을 전제로 방송총괄 기구화하는 안이 깊이있게 논의됐으나 수용되지 않았다. 종합유선방송위와 기능적 통합은 됐으나 권한이양이 이뤄진 것은 아니다. 방송운용 편성에 대한 정책 건의, 방송허가 재허가시 의견제출 등 실효성 없는 ‘건의’와 ‘의견제출’이 액세서리로 주어졌을 뿐이다. 재정도 공보처가 관장하고 있는 공익자금을 타서 쓰는 형태를 그대로 유지했다. 인사와 재정이 독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통합방송위가 공보처에 ‘건의’할 수 있는 정책이 어떤 수준이 될지 짐작 가능하다.

위원임명의 경우 1안으로 제시한 정부제청→국회동의→대통령 임명안은 어느 면에서 현재의 3부추천→대통령 임명보다 개악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KBS 경영위원회 설치, MBC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의 이사 임명 방식 개선, 교육방송 독립공사화, 방송사 시청자위원회의 기능 강화 등 뜨거운 논쟁을 일으켰던 핵심쟁점들에 대해서도 입을 다물고 있다.

KBS의 경우 현재 이사회가 영국의 BBC나 일본 NHK의 ‘경영위원회’와 기능이 유사하다는 설득력없는 한마디로 넘어갔고, EBS 공사화 문제는 교육부가 “별도로 안을 마련하겠다”고 요청해 왔다는 이유를 들어 검토대상에서 아예 제외됐다.

반면 공보처의 관할영역과 통제는 강화됐다. 방송법 개정때 명문화될 것이 확실시되는 공보처의 방송사에 대한 허가및 재허가권이 대표적이다. 공보처가 방송사의 ‘생사여탈권’을 틀어쥐게 된 것이다. 또 채널간, 매체간 치열한 경쟁의 와중에서 공보처가 그 조정 역할을 맡게됨에 따라 방송사간의 ‘눈치보기’가 나타날 것도 우려되고 있다.

대기업 방송진출 길 열어

이번 선진방송 5개년 계획의 또 하나의 특징은 대기업과 기존 언론사의 방송 진출길을 열어 놓았다는 점이다. 케이블TV의 경우 11개 대기업과 언론사가 이미 프로그램 공급자(PP)로 진출한 상태에서 또 다시 종합유선방송국을 겸영할 수 있도록 했으며 복수소유도 허용했다. 위성방송은 ‘별도검토’라는 단서를 달긴 했지만 허가될 것이 확실시 되고 있다.

오인환공보처장관은 국회 문체위에서 이 문제에 대해 유보방침을 밝히면서도 “참여허용이 세계적 추세”라고 답변, 그 방향을 짐작케 했다.

이대로라면 케이블TV와 위성방송을 징검다리로 재벌그룹이 지상파 방송까지 진출하는 상황이 단순한 가상으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간 재벌그룹의 방송참여는 상업적 경쟁에 따른 부작용과 사회 현상이 ‘자본의 시각’에서 해석되고 보도되는 데서 오는 의견의 획일화 등 사회적 역기능 때문에 제한돼 왔다. 이 둑이 경쟁력 강화라는 이름으로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보도채널은 안되고 전문편성만 해야 한다든지, 소유는 얼마 이내로 제한한다든지 하는 규제장치는 있지만 이 규제장치가 얼마나 효력을 발휘할 지는 극히 미지수다.

방송이 ‘사회적 공기’이고 특정인이나 특정집단이 독점적으로 소유할 수 없는 국민의 재산이라는 점에서 ‘자본’의 시각이 전파를 탄다면 이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특히 우리나라의 재벌은 아직 ‘천민 자본주의적’ 성격을 벗어나지 못해 여전히 언론의 주요한 감시·견제대상이 돼야 함에도 불구, 그 견제대상이 여론의 흐름을 좌우하는 방송사를 소유·운영하는 지위를 갖게 될때 심히 우려스런 결과가 예상된다.

방송시장의 개방에 대비, 일정 규모의 자본과 조직을 갖춘 대기업의 참여가 불가피하다는 측면을 이해는 할 수 있지만 이는 여론의 왜곡이나 다양성이 침해되지 않는다는 전제가 있을 때만 가능하다.

이런 문제들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만드는 것이 우선이다. 그리고 이에 따라 규제냐 탈규제냐의 입장을 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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