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자치의 전면적인 실시는 정치 경제 사회등 각 분야에서 ‘발상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지난 17일 조순 서울시장이 처음으로 출석한 국회 내무위에서 벌어진 ‘살해행위 발언파문’은 그 단적인 사례의 하나다. 내무위 소속 민주당 장영달의원의 투고를 게재한다. 편집자주


7월 14일은 국회 내무위원회에 민선 서울시장 조순씨가 처음 출석하는 날이었다.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였다.

본격적인 지방자치시대를 맞아 지방정부의 수장과 입법부의 첫 만남이라는 의미있는 순간이었지만 사안이 사안이었던 만큼 당초부터 격을 갖춘 만남은 기대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이날의 첫 만남은 이른바 여당의원의 ‘살해행위 발언파문’으로 파국으로 끝나고 말았다.

내무위에 참석한 조시장은 인사를 마치고 “양해하신다면 기획관리실장으로 하여금 보고드리도록 하겠다”고 제안했다. 국회 업무보고의 일반적 관행이 그러했지만 여당의원들은 시장의 직접 보고를 강력히 주장하고 나섰다. 삼풍사건은 너무 중대한 사건이니 시장이 직접 보고하라”는 것이었다. 몇사람의 의사진행 발언과 여야간의 말씨름끝에 간신히 기획관리실장의 보고가 시작될 수 있었다.

문제의 발언은 여섯번째 질의에 나선 민자당 김형오의원이 서울시의 초동 구조체제의 허점을 지적하면서 나왔다. 13개항에 걸쳐 질의를 했던 김의원은 자신의 질의에 대한 답변이 신통치 않다고 호통을 치면서 “초기에 구조작업을 제대로 했더라면 살릴 수 있었던 사람이 많지 않았느냐. 서울시가 인정한 것처럼 초기 복구작업의 잘못으로 유명을 달리한 사람이 있었다고 할 때 결과적으로 살해행위 아니냐”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

이 순간 조 시장이 격분해 마이크를 잡고 “아무리 국회의원이지만 말을 삼가시오. 누구를 살해했다는 거요. 당장 취소하지 않으면 더 이상 답변하지 못하겠소”라고 반박했다. 회의장은 순간 여야의원들의 고성으로 아수라장이 돼버렸다. 정회가 선포되고 여야 간사간의 협의 끝에 잠시후 회의를 속개했지만 조시장은 자리에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이해찬 부시장이 의견개진 기회를 요구했다. “서울시의 공식입장은 삼풍참사 현장에서 불철주야 형언할 수 없는 악조건을 무릅쓰고 작업에 임하고 있는 사람들과 서울시를 기만한 발언에 대해 도저히 용납할 수 없으며 정중한 사과와 속기록 삭제가 없으면 더이상 답변할 수 없다는 것이 공식입장”이라고 밝혔다.

임명직 시절엔 볼 수 없었던 현상이었다. 이제는 국회도 정도를 걷지 않고 무한권한만을 요구했을 때 더이상 민선시장으로 하여금 침묵과 복종만을 요구하기는 어려운 시대가 온 듯하다. 이날 사건은 우발적인 사건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넘어가기에는 권위주의와 매너리즘에 빠진 우리 정치행태의 치부가 노골적으로 드러난 것이었다. 만약 그 자리에 최병렬 전시장이 서 있었더라도 여당 태도가 그랬을까 생각해본다. 물론 이같은 질문은 야당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지방자치시대를 맞아 과연 우리 정치가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가를 자성하게 하는 뼈아픈 계기가 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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