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한게 아니냐. 판결 내용대로라면 앞으로 기사를 쓰지 말라는 것과 다름없지 않느냐.”
지난 7월 14일 서울지법 서부지원 제5민사부(재판장 손용근 부장판사)가 장기기증운동본부측 박진탁본부장의 청구를 거의 그대로 받아들여 국민일보에 대해 10일간 계속해서 반론문을 게재하라고 판결하자 국민일보사는 아연 실색하는 분위기였다. 더구나 반론문중 3회는 1면 머리에 실어야 한다는 판결에 대해선 기자들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정도였다.

심지어 일부 기자들은 재판부의 전력을 거론하면서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판결한게 아니냐는 불만을 터뜨리기도 했다.
이 소식을 접한 타 언론사도 아주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사안 자체야 국민일보와 장기기증운동본부간에 빚어진 것이었지만 이같은 판결이 앞으로 정정보도 청구소송에서 준용될 가능성이 높은 만큼 결코 남의 일이 아니라는 인식 때문이다.

모신문의 한 편집기자는 “같은 지면에 같은 횟수, 같은 밸류로 반론문을 실으라는 판결은 신문편집에 대한 기능적 이해가 전혀 고려되지 않은 것”이라며 “반론보장도 좋지만 ‘적정선’이라는게 있지 않느냐”고 말했다.

판결이 지나쳤다는 반응이다. 이같은 의견은 대체로 많은 기자들이 동의하고 있기도 하다. 반면 언론의 알릴 권리 측면에서 이번 판결이 문제가 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모방송사 시사프로 PD는 “고발·폭로물의 경우 당사자의 저항이 예상되기 때문에 취재에 완벽을 기하지만 간혹 1백% 완벽한 상태가 아니더라도 충분한 개연성이 있을 경우 보도를 내보낼 때가 있다. 그때마다 당사자가 반론을 요구할 경우 일일이 반론을 보장해 줘야 한다면 도대체 무슨 보도를 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이 PD는 “취재를 하다보면 취재원이 사실을 숨길때가 있고 의도적으로 취재를 피해 사실입증이 쉽지 않을때가 있는데 그렇다고 뻔한 사실을 눈앞에 두고 소송이 두려워 보도를 하지 않는다면 언론의 사회비리 고발기능은 사라지고 말 것”이라며 반론보장도 좋지만 언론의 알릴 권리도 그만큼 중요하게 배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언론사 내부에서는 대체로 이같은 의견에 공감을 표하고 있다. 현행 정간물법에 독소조항이 많기 때문에 아예 이 기회에 법개정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간부들도 있다. 관련법이 지나치게 포괄적으로 반론권을 보장하고 있어 언론의 보도기능이 위축되고 있다는 것이다(지금까지 법원의 판례는 언론사가 반론요구에 반하는 사실을 입증하지 못할 경우 반론을 보장해야 한다는 것으로 모아져 있다).

이번에 국민일보가 재판과정에서 위헌소송을 제기한데 대해서도 수긍하는 분위기다. 국민일보는 1심에서 언론사가 패소할 경우 2, 3심 절차를 밟기 이전에 무조건 정정 또는 반론문을 게재해야 하는 현행법은 재판받을 권리를 제한하고 있다는 논리를 폈다. 결과적으로 국민일보의 청구가 기각되긴 했지만 언론계 내부의 입장은 국민일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언론계 일각에선 언론사가 반론요구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과민하게 반응하고 있다며 이번 판결을 기화로 ‘시각교정’이 이뤄져야 한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게 대두되고 있다. 한신문기자는 “언론의 ‘알릴권리’가 중요한 만큼 보도대상자의 ‘반론권’도 충분히 보장돼야 하는데 지금껏 언론사 내부의 분위기는 반론문이 실릴 경우 언론사의 권위와 신뢰에 손상이 간다는 식으로 인식하고 있다”며 “근래들어 옴부즈맨 등의 영향으로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아직도 개선의 여지가 많다”고 말했다.
이같은 이유는 많은 언론인들이 반론=오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실제 사실(fact)의 오류를 바로잡는 정정보도와 보도대상자의 반론을 보장하는 반론보도가 현행법하에서 ‘정정보도’라는 이름으로 같이 묶여 있는 점도 정서적인 저항을 야기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이로인해 언론중재위 석상에서 쉽게 합의하고 넘어갈 수 있는 사안도 재판으로 이어지는 사례가 비일비재한 실정이다(정정보도 청구권은 용어와는 달리 일종의 반론권이라는 것이 법원의 판례다).

일선기자들은 최근 일부 언론사를 중심으로 시도되고 있는 인사고과제(인센티브제)도 반론보도에 대한 인식개선을 가로막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전한다. 당장 정정보도가 많이 나갈수록 데스크의 능력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비춰지기 때문에 가능하면 물밑작업을 통해 해결하거나 아니면 웬만큼 ‘합의’를 볼 수 있는 사안도 재판으로 끌고가는 일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실제로 일부 신문사에선 데스크가 소취하 압력을 가하기 위해 소송제기자의 비리를 캐내라고 담당 기자에게 잠복취재를 지시한 사실이 있는데 이같은 비정상적인 행태는 어느 언론사를 막론하고 좀처럼 근절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보다 큰 문제는 언론보도에 대한 소송이 급격히 늘고 있는데도 언론사 내부에서 관련 법률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드물다는 점. 이번 소송 당사자였던 국민일보 내부에서도 이 점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

반론권에 대한 인식만 제대로 가졌다면 언론중재위 중재 과정에서 합의에 도달할 수 있었고 국민일보측으로선 결국 ‘적절한’ 선에서 반론문을 게재하는데 그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언론계에선 우선 기자교육이 심도있게 실시돼야 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제기하고 있다. 현행법의 취지와 판례 등을 현장감 있게 교육, 실제 취재 및 기사작성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대비하는 것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인식의 변화도 중요하게 지적되고 있다. 반론문을 실었을 경우 언론사의 권위와 신뢰가 실추된다는 생각, 애초 기사의 크기와는 상관없이 1 ~ 2단 크기의 반론문을 실어주면 할 일을 다했다는 생각, 수사기관이나 정부의 발표에 대해선 반론을 해줄 수 없다는 생각 등에 변화가 요구되는 것이다.

물론 최근들어 한통사태 관련 박홍총장 발언보도, 북한장학금 교수 보도, 박창희교수 노동당 입당보도 등에서 보듯 언론사의 반론보장 인식이 조금 나아지고 있지만 여전히 문제는 잔존하고 있다. 한통사태 관련 김영삼대통령의 ‘국가전복 저의’ 발언보도에 대해 원칙적으로 반론을 보장해야 함에도 불구, 권력층의 눈치를 보고 있는데서도 개선의 여지가 많은 것이다.

현재 국민들의 반론권에 인식이 급속도로 커지고 있고 또 앞으로 외국처럼 거액의 손해배상 소송이 제기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는데 따른 대비도 인식의 변화 못지 않게 중요시 되고 있다.
이와 관련, 전문 변호사제도 도입의 필요성이 강하게 대두되고 있다.

분쟁을 야기할 소지가 있는 기사에 대해 사전에 스크린할 수 있는 전문변호사를 둘 필요가 있다는 견해다. 현재 세무관계 등을 전담하고 있는 고문변호사제를 통해선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않기 때문에 비상근이라도 언론 전문 변호사를 위촉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것이다.

최근 통신의 발달로 변호사가 굳이 언론사에 오지 않더라도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정 시간대에 기사를 스크린 할 수 있다는 점을 내세우고 있다. 어쨌건 최근 법원의 판결이 언론에 대해 보다 엄격해지고 있는 점을 감안, 언론계 내부의 변화가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다는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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