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덕꾸러기로 자란 아이는 밖에 나가서도 그런 대접을 받는다고 했다. 그래서 현명한 부모는 자식을 엄하게 키우지만 또 귀하게 여길 줄 안다. 27일 워싱턴 캐피털 힐튼 호텔에서 있었던 김영삼대통령과 워싱턴 특파원들과의 50분간의 간담회는 그야말로 현명치못한 부모와 천덕꾸러기 자식과의 만남같은 자리였다.

김영삼 대통령은 기자들의 질문에 대해 기사가 될 만한 얘기는 하지 말자 광복절에 할 얘기를 오늘 하면 어떻게 하느냐며 피해갔다. 대통령은 피곤해보였고 말하기 싫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마지못해 만나주는 것 같은 분위기에 이 자리에 참석한 대부분의 워싱턴 특파원들은 불쾌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이날 간담회 내용은 29일자 경향을 비롯한 몇개 일간지에 작게 보도됐다. 정보를 가지고 있는 대통령이 기사될 만한 얘기는 하지 말자며 한국기자들의 질문을 피해 나갔으니 기사가 안 나오는 건 당연했다. 또 보통 기사가 될만한 건 수행기자단에 풀(pool)해 주었던 관례에 비춰볼 때 꼭 섭섭해할 수만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다음날인 28일 CNN과의 회견에서 보여준 대통령의 태도는 간담회 자리에 참석했던 한국기자들을 씁쓸케 하기에 충분했다. 바로 전날까지만 해도 하고 싶지 않다던 얘기를 CNN과의 회견에서는 성실하게 답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대통령은 광복50주년이 되는 8월15일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획기적인 대북 제안을 내 놓을 것이라고 밝혔고, 이날 회견내용은 30일자 한국신문에 일제히 1면에 크게 보도됐다.
모신문사의 한 워싱턴 특파원은 같은 사안에 대해 한국기자들과의 간담회 자리에서는 답변을 피하다가 CNN과의 회견에서 답변하는 것을 보고 불쾌한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워싱턴의 또다른 특파원도 자국의 기자들을 우습게 여기는 이같은 태도는 사대주의에 다름아니다고 지적했다.

우리나라의 얘기가 외국에서 먼저 보도되고 또 그것을 한국언론이 인용하는 경우가 비단 어제오늘의 일만은 아니다. 그러나 대통령까지 자국의 언론보다는 외국의 언론을 더 먼저 챙기는 것은 국가의 자존심 문제다.

자국의 언론인들을 마치 천덕꾸러기 취급한 대통령의 이번 처사는 온당치 못하다. 그런 것이 세계화는 아닐 것이다. 김영삼 대통령이 말하는 세계화가 사대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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