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데타직후 군사정권은 물리적인 힘을 앞세운 일련의 언론통제를 시작했다. 그 이유는 군사쿠데타가 정당성을 획득하는데 언론의 협조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군사정권은 언론사전검열 실시를 비롯해 언론기관 정화, 부패언론인 명단 등을 빌미로 언론고유의 비판보도 기능을 무력화시켰다.

1961년 5·16 쿠데타직후 군사정권은 물리적인 힘을 앞세운 일련의 언론통제를 시작했다. 그 이유는 군사쿠데타가 정당성을 획득하는데 언론의 협조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군사정권은 쿠데타와 동시에 전국계엄령을 선포해 언론사전검열을 실시했으며, 또 ‘반혁명적 선전선동사항’, ‘치안유지 유해사항’, ‘허위 및 왜곡사항’을 포함한 9개 항목의 보도금지사항을 발표해 언론의 정상적인 보도기능을 마비시켰다.

그리고 5월 23일에는 ‘사이비 언론인과 언론기관 정화’를 내걸고 국가재건 최고회의 포고령 제11호를 발표했다. 즉 “신문과 통신을 발행하려는 자는 이에 필요한 시설을 갖추어야 하고 이를 위반한 간행물은 등록을 취소할 것이며 당분간 신규등록은 접수치 않는다”는 요지의 언론기관 정비조치이다.

5월 28일 언론기관 정비결과 발표에 따르면, 서울에서 일간지 47개, 통신 2백41개, 주간지 3백24개가 무더기로 등록취소되었고, 지방에서도 일간지 27개, 통신 64개, 주간지 1백29개가 역시 등록취소당했다. 전국의 9백16개 등록언론기관중 약 91%에 달하는 8백 34개사가 강제폐간된 것이다.

여기에 월간, 계간 등까지 합치면 폐간 언로사는 무려 1천1백70개에 달했다. 언론기관정비는 5·23조치 이후에도 계속 진행되어 ‘62년 8월 무렵에는 모두 1천2백21개사가 등록취소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같은 언론정비조치는 건국이래 단행된 최대 규모의 언론탄압이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신문계의 전면적인 구조개편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특히 일간신문의 경우 계속 발행자격을 얻은 서울의 15개사와 지방의 24개사중 대부분의 신문들은 그후 새로운 신문의 창복간이 거의 허용되지 않았던 상황에서 한국신문업체의 유력 중앙지와 지방지로 자리잡게 되었던 것이다.

언론정비조치의 목적은 무엇보다도 군정당국이 언론기관의 힘을 악화시키고자 하는데에 있었다. 사전검열과 언론기관 정비로 언론의 보도기능은 무력해질 수밖에 없었다. 61년 8월4일<타임>지는 한국언론을 가리켜 ‘벙어리신문’이라 평했으며, 7월19일 박정희 최고회의의장은 기자회견에서 “언론인은 기개가 부족하다”고 비웃었다.

언론기관정비가 끝나자 군사정권은 새롭게 부패언론인 정화문제를 거론하기 시작했다. 방미중이던 박정희의장은 61년 11월22일 미국 프레스클럽 연설에서 “과거의 많은 신문들이 금전에 좌우되고 부패했으며 공산주의 색채를 띠었다”고 비난했다.

그리고 동경으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부패언론인들이 언론계 자체에 의해 자율적으로 정리되길 바란다. 우리가 손을 대려 했으나 그것을 기다리겠다”고 말했다. 또 12월7일 귀국후 첫 기자회견에서는 언론인 가운데 부패인사가 있으며 그 명단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면서 언론계의 명예를 위해 자가숙정할 것을 바란다고 경고했다.

이같은 일련의 담화가 있은 후 한국 신문편집인협회와 일간신문발행인협회등 언론단체들과 일선기자 대표는 12월16일 모임을 갖고 언론계 정화문제를 검토했으나 이렇다 할 결론을 내리지는 못했다.

또 이 무렵 한국신문윤리위원회 또한 뚜렷한 입장을 표명하지 못했다. 61년 9월12일에 발족한 한국신문윤리위원회는 이에 앞서 7월에 군사정권이 명예훼손기사의 게재금지와 등록취소 등의 내용을 담은 <신문등 등록법안>을 제정하려고 하자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서둘러 결성되어 언론자율규제 기능을 맡고 있었다.

그후 부패언론인 정화문제가 다시 표면화되기 시작한 것은 해를 넘겨 62년 4월16일 이후락 최고회의 공보실장이 “언론계 정화에 정부는 큰 관심을 갖고 있다”고 언명하면서 부터이다. 대한일보는 4월20일자에 최고회의의 한 소식통을 인용하여 “정치정화가 끝나면 언론계 정화를 입법화시킬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하면서 입법화 문제에 앞서 “정부는 부패언론인 43명의 명단을 공개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당시 언론계는 부패언론인 정화문제의 입법화와 명단공개에 촉각을 곤두세우면서 심리적 압박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언론정화법>을 제정할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왔다.

경향신문은 4월22일자에서 “수사당국이 작성한 문제의 리스트에 이하면 경영자급이 3∼4인, 중견간부가 10여명이고 나머지 30여명은 구정부 때의 일선기자로 지금 현역도 있고 퇴역도 있다”고 보도했다. 또 5월29일 이후락 최고회의 공보실장은 치부한 부패언론인이 백명도 넘는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군사정권은 끝내 이 명단을 발표하지 않았다. 다시말해 엄포만 떨었던 것이고, 결국 언론계의 아킬레스건을 잡아 언론의 비판능력을 마비시킴과 동시에 언론을 쿠데타 사업에 협조시키자는데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언론길들이기 작전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언론기관 정비가 물리적 힘에 기초했던 것인 반면에 부패언론인 정화는 고도의 심리작전이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언론길들이기 작전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언론기관 정비가 물리적 힘에 기초했던 것인 반면에 부패언론인 정화는 고도의 심리작전이었던 것이다.

부패언론인 정화문제는 62년 6월28일 군정의 <언론정책>발표로 종결된다. <언론정책>의 ‘언론정책>의 ‘언론정화’지침 항목에서 군사정권은 “언론인의 과거는 일체 불문에 붙임을 원칙으로 하며 그 정화를 위한 입법이나 강제정화법은 지양한다”고 밝혔다.

이로써 언론인정화 문제는 언론계의 자율에 맡겨지게 된 셈이었으나 군사정권은 줄곧 ‘언론의 책임’을 강조하면서 언론통제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1964년 <언론윤리위원회법>이다.

한편 언론인 정화문제와 함께 군사정권은 쿠데타직후부터 사이비기자, 악덕기자, 공갈기자 외에도 각종 죄목과 필화사건 등으로 기자들을 계속 구속해왔고 또 재판에까지 회부했다. 61년 5월16일부터 62년 5월22일까지 약 1년 1개월동안에 기자 신분으로 체포되거나 재판에 회부된 인원은 무려 9백60명에 달했다.

이들중에는 대다수가 사이비기자들임에 분명하지만 이외에도 포고령이나 반공법 위반, 필화사건 등 취재보도상의 문제로 구속된 인원도 1백41명에 달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사건은 역시 혁신계 신문인 <민족일보>간부의 구속과 군사재판이었다. <민족일보>간부 8명이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사장 조용수는 사형이 집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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