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일보의 창간은 4·19 이후 주어졌던 언론자유의 산물이었다. 즉 언론자유의 허용으로 사이비 언론이 등장하는 부작용도 있었지만 한편에서는 진보적인 성향의 신문도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민족일보는 5·16 군사쿠테타 3일후인 5월 19일 결국 폐간당하고 사장 조용수를 포함하여 주요 임직원이 구속됐다. 조용수사장은 결국 사형을 당하고 말았다.


4·19 학생혁명으로 정기간행물에 대한 허가제가 철폐되면서 군소 언론기관들이 우후죽순격으로 생겼다. 이것은 1960년 7월 1일 당시 허정 과도정부가 ‘신문 및 정당 등의 등록에 관한 법률’을 공포하여 등록만 하면 누구나 자유롭게 신문 등을 발행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등록제가 실시된지 약 8개월이 지난 1961년 2월말의 조사에 따르면 일간신문은 41종에서 1백24종으로, 주간신문은 1백36종에서 5백13종으로, 특히 발간이 손쉬웠던 일간통신은 14종에서 2백85종으로 20배 이상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신문 등의 급증은 허가제로 인해 발행이 봉쇄되어 있다가 갑자기 자유가 주어지면서 생겨난 불가피한 현상이었다. 그러나 언제 다시 발행에 대한 제한이 가해질지 모른다는 우려속에 판권을 하나의 이권으로 여겨 정기간행물을 발행하는 경우도 적지 않아 사이비 언론의 문제점도 드러났다.

이런 사이비 언론을 ‘4월신문’이라 비꼬기도 했고 나아가 ‘신문망국론’까지 나왔다. 과도기적 현상일 수 있었던 사이비 언론문제와 관련해 언론계 내부에서도 언론사 난립 방지와 사이비 기자 대책이 필요하다는 주장들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모처럼 주어진 언론자유에 대해 제약이 가해지면 안된다는 분위기 때문에 구체화되지는 못했다. 민주당 정권의 장면도 “악덕 언론인을 단속하라는 국민의 여론이 압도적으로 커질 때”에는 불가피하게 언론규제를 하게 될 수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4·19는 언론자유가 허용돼 새로운 신문들이 쏟아져 나오게 된 것 뿐만 아니라 그동안 억눌렸던 민주주의와 민족주의에 대한 민중들의 요구가 분출되는 계기도 됐다. 이는 구체적으로 반민주행위자와 부정축재자의 처벌, 빈곤타파 나아가 민주화와 민족통일에 대한 요구였다.

그러나 장면정권은 이런 민중들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했다. 오히려 정권 내부의 분열과 정책 추진의 혼선이라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보수적인 성격만 더욱 짙게 드러냈다. 그리하여 국민들의 불만이 갈수록 고조됐고 이는 다양한 집단활동으로 표출됐다.

4·19 이후 혁신계 세력들은 당시로서는 금기시됐던 반외세자주화운동과 민족통일운동을 주장했다. 7·29총선에서 대패한 후 혁신계 세력들은 통합노력을 기울이는 한편 대국민 의사전달통로로서 신문 창간을 의도했다. 혁신계 세력들은 논란 끝에 민족일보를 창간하게 됐다.

사장에는 파벌에 깊이 간여한 바 없고 자금조달능력면에서도 평가를 받고 있었던 재일거류민단출신의 조용수가 발탁됐다. 간부진들은 각 계파가 안배, 민족일보는 혁신세력을 대표하는 신문으로 대중들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1961년 2월 13일 창간된 민족일보는 “민족의 진로를 가리키는 신문”, “부정과 부패를 고발하는 신문”, “근로대중의 권익을 옹호하는 신문”, “조국의 통일을 호소하는 신문”을 사시로 내세웠다.

민족일보의 창간은 4·19 이후 주어졌던 언론자유의 산물이었다. 즉 언론자유의 허용으로 사이비 언론이 등장하는 부작용도 있었지만 한편에서는 진보적인 성향의 신문도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보수적인 민주당 정권은 진보적인 신문의 활동을 그냥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민족일보 창간 이전부터 조총련계 자금유입설이 유포되면서 국회에서 크게 논란을 빚기도 했다. 이밖에도 여러 제약들이 뒤따랐다.

민족일보는 한 때 3만 5천부 정도를 발행하면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기존의 주요 신문들의 발행부수가 10여만부 정도였던 시절에 신생 신문이 가판에 주로 의존하며 3만 5천부 정도를 발행할 수 있었던 것은 4·19 직후 외세의존극복과 민족통일추진에 대한 사회적 욕구가 젊은 층을 중심으로 비교적 강했기 때문이었다.

진보적 논조로 인해 민족일보는 창간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곤란을 겪게 됐다. 민족일보는 자체 인쇄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정부 기관지였던 서울신문과 계약하고 인쇄를 해왔다.

민주당 정부는 서울신문에 압력을 가해 민족일보의 인쇄를 즉각 중단시키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에 따라 민족일보는 3일 동안 발행되지 못하다가 산업경제 신문의 인쇄시설을 이용해 다시 발행될 수 있었다.

보수적인 정치풍토에서 여러 번 논란을 빚으면서도 계속 발행될 수 있었던 민족일보는 5·16 군사쿠테타 3일후인 5월 19일 결국 폐간당하고 사장 조용수를 포함하여 주요 임직원이 구속됐다.

군사정권은 조총련계 자금유입과 평화통일주장을 문제삼아 민족일보를 ‘북한에 동조하는 용공신문’으로 규정해 7명을 유죄처분했고 또한 3명은 다른 사건으로 역시 유죄처분했다. 그 중 사장 조용수는 결국 사형을 당하고 말았다.

민족일보 폐간과 구체적인 물증의 제시조차 없이 이루어진 민족일보 관련 언론인에 대한 강력한 사법처분은 군사정권의 향후 행보를 읽게 하는 것이었다. 언론활동에 대한 무력 시위이기도 했으며 4·19 이후 분출되기 시작한 민주화와 민족통일에 대한 민중적 요구에 대한 분명한 경고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반공이데올로기의 강화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4·19로 주어졌던 언론자유는 5·16으로 채 뿌리도 내리기 전에 완전히 유실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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