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조사 결과에 몽환적으로 취해있었다. 그 여론조사는 우리 한나라당 지지층만 자신 있게 응답하는 조사였다.”

친박근혜계인 한나라당 유기준 의원이 지난해 6월 7일 여당 의원 워크숍에서 지적한 내용이다. 당시는 한나라당이 6․2 지방선거에서 ‘충격의 참패’를 겪은 직후이다. 여당에서 지방선거 결과를 ‘충격’으로 받아들인 이유는 여론조사 결과와 달라도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당시 이런 일이 있었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지방선거를 앞둔 5월 11일 출입기자들에게 5월 9일 청와대가 자체 조사한 이명박 대통령 국정수행지지도가 51.7%까지 올라갔다고 설명했다. 언론은 “취임 후 최고수준”이라고 평가했다.

   
  ▲ 이명박(사진 가운데) 대통령. ⓒ연합뉴스  
 
지방선거가 정권 중간평가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은 상식이다. 청와대 주장대로라면 지방선거는 한나라당에 압승을 안겨줬어야 옳다. 서울신문은 5월 12일자 2면 기사에서 “이 대통령의 높은 지지율은 '중간평가' 성격이 짙은 6월 지방선거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정말 청와대와 언론이 주장한대로 그런 결과가 나타났을까. 지방선거 다음날인 조선일보 6월 3일자 1면 머리기사 제목은 <한나라 완패…‘지방권력 대이동’>이라는 기사를 실었다. 한나라당은 보수신문이 지적한대로 ‘완패’ ‘참패’를 경험했다.

서울 25개 구청장 가운데 21개 구청장을 야당(민주당)이 승리한 결과는 한나라당 수도권 의원들에게 선거공포를 현실로 경험하게 했다. 당시 선거에 참여한 유권자는 2116만 2998명에 달한다. 2000만 명이 넘는 유권자 가운데 언론 여론조사에 응답한 경험이 있는 이들은 얼마나 될까.

청와대나 언론이 조사한 ‘정치 여론조사’는 민심의 현주소를 반영한 결과가 아니라 민심 조작의 전파 수단과 다름없었다. 왜곡된 여론을 기정사실화하면서 대세몰이를 했기 때문이다.

   
  ▲ 조선일보 2010년 6월 3일자 3면.  
 
한국의 ‘정치 여론조사’는 구조적 한계를 안고 있다. 한국 여론조사 기관이 흔히 사용하는 전화번호부 여론조사는 전체 유권자를 대표하기에 심각한 결함이 있다. 2007년 기준으로 전화번호부 등재비율은 57.2%에 불과하다. 2011년 현재는 이 비율이 더 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집 전화가 없는 유권자는 여론조사 대상에서 제외된다.

집 전화 여론조사는 여성의 경우 주부, 남성의 경우 무직자의 ‘과다 표본’ 문제가 발생한다. 한국 여론조사는 성별, 연령별 비율은 맞추지만 직업별 비율을 맞추지는 않는다. 낮에 집에 전화할 때 전화 받을 확률이 높은 주부와 무직자 등의 의견이 여론조사에 비중 있게 반영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주목할 대목은 주부와 무직자가 한나라당 강세 직업군이라는 점이다.

또 하나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부각되는 문제가 있다. ‘표현의 자유’가 억압받는 현실에서 정권에 불리한 응답을 꺼리는 태도가 감지되고 있다는 점이다. 야권 지지층이 응답자체를 거부하거나 여당에 유리한 응답을 하는 게 사실이라면 해당 여론조사의 신뢰성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종합해보면 지방선거 ‘정치 여론조사’의 예측 실패는 이변이나 우연이 아니라 예고된 결과로 볼 수 있다. 정치권과 언론, 여론조사 전문가들은 입을 모아 ‘정치 여론조사’ 개선책 마련을 강조했다.

하지만 지방선거가 끝나고 잠깐 ‘반성의 기류’가 엿보이더니 다시 잠잠해졌다. 문제가 고쳐지지 않은 ‘정치 여론조사’는 지금도 반복된다. 새해를 맞아 언론이 쏟아내는 정치 여론조사도 지방선거 당시 한나라당과 청와대에 웃음꽃을 안겨줬던 바로 모습을 재연하고 있다.

   
  ▲ ⓒMBC  
 
KBS MBC SBS 등 방송 3사가 발표한 정치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대한민국은 ‘태평성대’ 시대에 살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국민에게 두터운 지지를 받는 대통령이고, 집권 한나라당은 다른 야당을 압도하는 국민 지지를 받는 정당이다. 여론조사 결과가 사실이라면 그렇다.

MBC는 지난달 27일 코리아리서치센터에 의뢰해 전국 성인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전화 여론조사(95% 신뢰수준에 표본오차 ±3.1%포인트)를 벌인 결과, 이명박 대통령이 국정운영을 잘하고 있다는 응답이 53.3%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잘못하고 있다’는 응답은 38.7%에 불과했다.

KBS는 미디어리서치에 의뢰해 전국 성인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전화 여론조사(표본오차는 ±3.1% 포인트)를 벌인 결과, 개헌이 필요하다는 응답이 69.4%로 반대보다 훨씬 높았다고 보도했다.

KBS 조사에서 차기 대선주자인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지지도는 34.6%로 조사됐지만 야권의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7.9%, 한명숙 전 국무총리 6.2%, 손학규 민주당 대표 6.0%로 나타났다.

SBS가 TNS에 의뢰해 12월 28일부터 이틀간 전국 19세 이상 성인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전화여론조사(95% 신뢰수준에 오차한계는 ±3.1% 포인트)를 한 결과, 한나라당 지지도는 34.8%, 민주당 지지도는 17.6%로 조사됐다.

여론에 영향이 큰 방송사의 새해 여론조사 결과는 하나 같이 여권에 희망적인 소식이다. 대통령 지지도가 최고 수준이고, 한나라당 대선주자 지지율은 야당 후보군을 압도하고, 한나라당 정당 지지도는 야당의 2배 수준이라고 발표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다. 구제역 파문으로 전국의 농가가 시름을 앓고 있고, ‘자연산’ ‘포탄’ 발언으로 집권 여당 대표가 조롱거리가 되고, 정부는 보수 언론사에게만 방송사라는 특혜성 선물을 안겨주고, 대통령은 ‘회전문 인사’를 반복하는 상황에서도 청와대와 한나라당에 유리한 여론조사 결과가 쏟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 내일신문 2010년 12월 31일자 3면.  
 
언론이 주장하는 ‘정치 여론조사’대로라면 1년 여 앞으로 다가온 차기 총선이나 내년 12월 열리는 대선에서 한나라당은 안정적 승리가 예상된다. 여론조사 결과가 그렇단 얘기다.

분명히 해둘 게 있다. 정치 여론조사의 한계는 이미 드러났다. 문제점은 전문가들 모두가 공유하고 있다.정치 여론조사는 이미 신뢰를 잃었다. 누구의 얘기인가. 누리꾼의 얘기인가. 야당의 얘기인가. 이명박 대통령에 비판적인 언론의 목소리인가. 꼭 그렇지는 않다. 한나라당 내부의 목소리도 그렇기 때문이다.

내일신문은 12월 31일자 3면 <“지지율 40%대라고? 허수 많다”>라는 기사에서 “청와대에선 지지도가 40%대니 50%대니 자랑하는데, 실제 지역구에서 들어보면 실제 지지율은 훨씬 낮다”라는 한나라당 수도권 의원 얘기를 전했다.

한나라당이 여론조사에 취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경고는 여당 지도부 회의에서도 터져 나왔다. 홍준표 한나라당 최고위원은 12월 30일 “지금 청와대에서도 국정수행지지도 조사를 집 전화로 여론조사를 해서 국정지지도가 몇 %, 몇%, 이것이 잘 되는 방향으로 또 하고 있고 이 여론조사 좋다, 이런 식으로 하는데 실제로 바닥민심은 그렇지 않다”고 지적했다.

   
  ▲ 안상수 한나라당 대표. ⓒ연합뉴스  
 
현재의 정치 여론조사는 구조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 개선이 필요하다는 게 한결 같은 목소리이다. 그 해결책 중 하나가 집 전화 여론조사를 성인남녀 대다수 지닌 휴대전화로 하자는 얘기다.

홍준표 한나라당 최고위원은 휴대전화 여론조사 필요성을 제기하며 당 지도부를 향해 이렇게 얘기했다.

“우리가 지금 발표되는 여론조사는 보수층들이 한 80%이상 집 전화를 가지고 있고 좀 자유스러운 개방 마인드를 갖고 진보적인 측면의 젊은이들이나 40대들은 이미 집 전화가 없다.”

집 전화 여론조사는 어쩌면 보수 성향 유권자들 위주의 응답을 이끌 수 있다는 지적이다. 지난해 6월 7일 한나라당 유기준 의원이 의원 워크숍에서 밝힌 내용을 떠올리게 하는 내용이다. 당시 주장은 이런 내용이었다.

“여론조사 결과에 몽환적으로 취해있었다. 그 여론조사는 우리 한나라당 지지층만 자신 있게 응답하는 조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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