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조사가 가뭄의 단비처럼 인식되던 시절도 있었다. 일부 신문과 방송이 여론을 쥐락펴락하던 1990년대 중반까지 여론조사 결과는 ‘진짜 민심’에 목말라 있던 이들에게 유용한 존재였다. 그러나 현실 정치에서 여론조사가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커지면서 ‘여론조사’는 되레 정치를 삼켜 버렸다. / 편집자 주

6·2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 패배를 조심스럽게 점치는 견해가 없지는 않았다. 정두언 당시 한나라당 지방선거기획위원장은 4월 25일 기자간담회에서 “서울은 강남을 빼놓고 (구청장 선거에서) 백중 열세인 게 사실”이라고 밝혔다.

한나라당 지방선거 컨트롤타워의 주장이었지만, 언론은 ‘엄살’에 무게를 실었다. 한나라당의 비관적 선거전망을 전한 결과물은 여론조사에도 담겨 있었다. 중앙일보, SBS, 동아시아연구원, 한국리서치는 5월 24~26일 서울과 경기, 충남, 경남, 전북 등을 대상으로 패널조사를 벌였다. “이명박 정부의 실정을 심판해야 한다”는 물음에 5개 지역 유권자 3명 중 2명이 동의했다. 바닥 민심은 ‘정권 심판론’이 견고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한나라당 불리한 정보는 눈감았던 언론= 여권에 불리한 시그널이 없지 않았지만 언론은 섣불리 ‘한나라당 대세론’에 힘을 실었다. 한나라당 우세함을 알리는 여론조사 결과가 훨씬 더 많았기 때문이다. 또 언론은 바닥민심을 제대로 살피고자 노력하지 않았다.

오세훈 서울시장과 함께 선거막판까지 초박빙 승부를 연출했던 한명숙 전 국무총리의 서울시장 유세 현장에 동행하는 언론사 기자는 손에 꼽을 수준이었다. 취재 자체를 게을리 했으니 후보의 진짜 바닥민심이 어떤지 알기 어려웠다.

언론은 홍수처럼 쏟아지는 여론조사와 각 당 선거책임자, 정치 전문가 의견을 곁들여 판세를 분석했지만, 여론조사 결과는 판단의 기본으로 활용됐다. 똑같은 자료를 놓고 견해를 밝히니 ‘한나라당 우세’라는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언론이 지적한 ‘숨은 표’도 존재했다고 봐야 한다. 표현의 자유가 제약받는 현실에서 유권자들은 여권에 불리한 응답을 꺼리는 모습이었다. 실제로 유기준 한나라당 의원은 6월 7일 의원 워크숍에서 “여론조사 결과에 몽환적으로 취해있었다. 그 여론조사는 우리 한나라당 지지층만 자신 있게 응답하는 조사였다”고 지적했다.

▷한나라당 의원 “여론조사에 몽환적으로 취해”=
주요 정당의 전문가라는 사람들도 민심 읽기에 실패한 경우가 있었기에 언론만 문제는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언론이 면죄부를 받기는 어렵다. 국민이 언론의 정치분석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일반인이 짚지 못하는 맥을 알기 쉽게 짚어내고, 민심의 현주소와 선거 판세에 대한 유용한 정보가 담겨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언론이 이번 지방선거와 같은 참담한 선거예측 실패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여론조사 정치’의 수렁에서 스스로 벗어나는 노력이 필요하다. 양권모 경향신문 정치부장은 “경향신문은 가능한 경마식 보도를 자제한다는 의미에서 여론조사를 한 차례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경마식 보도를 언론 스스로 자제했다는 점은 평가할 일이다. 언론도 ‘여론조사 정치’의 폐해에 대해 잘 알고 있다. 문제는 그 해법 찾기를 위한 공동 노력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시스템을 통해 바닥민심을 제대로 읽는 방안을 찾아 나가는 노력도 필요한 상황이다.

▷여론조사 맹신, 언론 신뢰 갉아 먹어=한국일보 이종재 편집국장은 “여론조사는 이전에도 틀린 적이 있지만 이번에는 오보라 할 정도로 유독 크게 틀렸다”면서 “언론사가 여론조사를 맹신하다 보니 진짜 바닥 민심이 무엇인지에 대해 밀착된 취재가 부족했던 게 아닌가 생각된다. 내부적으로 반성도 나왔다”고 말했다.

한국 정치 여론조사가 안고 있는 한계와 현실을 개선하는 노력도 요구되는 대목이다. 한국 여론조사는 짧은 시간에 적은 비용을 들여 결과물을 얻어내려고 하니 ‘함량미달 결과물’로 이어지고 있다. 여론조사는 무시할 필요도 맹신할 필요도 없지만, 지금의 ‘여론조사 정치’는 어떤 형태로든 개선책을 찾아야 한다는 게 언론계 내부도 공감하는 대목이다.

류순열 세계일보 정치부장은 “여론조사를 하면 수백만 원에서 수 천만 원 정도가 드는데 돈을 들인 결과물을 언론사는 최대한 지면에 반영하려고 하다 결국 자기신뢰를 갉아먹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고 지적했다. 여론조사 인용보도에 앞서 결과에 대한 검증 노력이 선행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외면할 수 없는 여론조사 그 대안은? =여론조사 기법의 과학적 대안 찾기도 필요하지만, 언론이 여론조사를 걸러서 해석하는 노력도 중요하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언론은 청와대가 전하는 국정운영지지도 받아쓰기에 앞서 실제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대한 국민평가가 실제로 어떤지 심층 분석하는 노력도 요구된다. 언론은 지방선거에서 여론조사 때문에 크게 화를 입었지만, 여론조사를 외면하기는 어렵다. 여론조사는 선거는 물론 평소에도 정치 현주소를 알리는 척도로 존재 이유가 여전하기 때문이다.

성한용 한겨레 편집국장은 “현재의 전화면접 여론조사가 과거에 비해 정확도가 떨어진다는 것은 언론사 기자나 여론조사 전문가, 각 당 선거전문가들이 모두 인식하고 있다”면서 “모바일을 이용한 여론조사, 대면조사, 패널조사 등 좀 더 과학적인 조사기법을 개발하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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