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순정만화계의 대모로 불리는 황미나 작가가 난처한 입장에 처했다. 최근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김은숙 작가의 SBS 주말 드라마 ‘시크릿 가든’에 이른바 ‘표절 문제’를 제기하고 난 뒤 부터다. 누리꾼은 ‘비슷하지도 않은데 웬 표절이냐’ ‘자기애 종결자’라는 등의 냉소를 보내고 있다. 

발단은 황미나 작가가 매주 화요일로 예정되어 있는 네이버 웹툰 보톡스의 휴재를 알리며 쓴 글에서 시작되었다. 황미나 작가는 “언제까지 소재 제공자로 살아야 하느냐”며 이번 주는 휴재한다고 밝혔다. 또 작가와 같이 작업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동생 황선나씨는 팬까페에 글을 올려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모 드라마의 일부 에피소드가 보톡스와 너무 유사한 것을 알고 있느냐”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그러자 ‘시크릿 가든’의 김은숙 작가가 반격에 나섰다. 김은숙 작가는 14일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정말 화나는 일이 생겼다. 만화가 황미나씨께서 제 드라마가 본인의 웹툰을 ‘이것저것’ 자져다 표절을 했다고 주장했다. 황미나 작가가 주장한 4가지 설정은 흔하디 흔하다. 나도 내 작품에 자존심이 있다“ 라는 글로 자신의 심경을 표현했다.

드라마의 제작을 맡고 있는 화앤담픽쳐스도 15일 보도자료를 내어 “표절은 말도 안된다, 황작가는 입장을 밝히기 바란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하지만 황미나 작가측은 ‘시크릿 가든’이라고 드라마를 명시한 적도, 표절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적도 없다. ‘소재 도용’ , ‘아이디어 제공’이라는 표현을 쓴 것이다. 이를 표절 논쟁으로 격화시킨 것은 언론이다. 언론은 황선나씨의 글에서 표절과 관련된 부분만 자극적으로 부각해 기사를 썼다. 그러다 황미나 작가가 작년에 방영된 SBS 드라마 ‘미남이시네요’에도 캐릭터를 차용당한 것 같다는 글을 쓴 것을 찾아내 자극적 보도를 이어가고 있다.

   
  ▲ (왼쪽) 황미나 작가, 김은숙 작가  
 
누리꾼들은 황미나 작가가 경솔했다는 반응을 내놓고 있다. 표절에 확신을 갖는다면 구체적으로 드라마 이름을 명시하고 어느 어느 부분이 표절인지 정확히 밝혀야 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하지만 황 작가를 옹호하는 누리꾼들은 ‘시크릿가든’이 기획단계에선 게임과 현실을 오가는 연애스토리였다는 점을 근거로 들며 황미나 작가가 표절이라고 생각할만한 근거가 있다고 주장한다.

“보톡스와 시크릿 가든 사이 중요한 이야기 뼈대가 같아야 표절”

하지만 전문가들은 보톡스와 시크릿 가든을 표절로 보기엔 무리가 있다는 의견을 밝혔다. 한 미디어 관련학과 교수는 “표절이 성립되려면 이야기의 뼈대가 되는 설정을 그대로 가져와야 한다. 하지만 두 작품이 그렇다고 보기는 좀 무리가 있다”고 밝혔다. 또 “김은숙 작가의 표현대로 시크릿가든은 전형적인 로맨틱 코미디의 문법을 따르고 있어 황미나 작가의 고유한 창작물을 가져다 썼다고 보기에도 어려울 수 있다” 라는 의견을 밝혔다.

하지만 소재 도용이라는 부분에 대해선 “창작자들의 영역이니 말하긴 어렵지만 황 작가 입장에서 그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고 또 만화가들 사이에선 그런 ‘피해의식’이 어느 정도 공유되고 있기도 하다”고 이야기했다.

   
     
 
80-90년대를 호령했던 만화시장이 지금은 산소호흡기로 버티는 신세가 되었다는 점은 이미 많은 이들에게 알려진 부분이다. 만화로 감성을 살찌운 30~40대는 지금의 대중문화 시장을 진두 지휘하는 브레인이 되었지만 지금의 만화는 맥을 못 추고 있다.

다양한 미디어가 없었고 영상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 만화는 장르를 가리지 않고 무엇이든 할 수 있었고 대중은 그에 열광했다. 하지만 영상기술이 점점 발달하며 만화에서만 가능했던 영역이 방송과 영화 등으로 상당 부분 넘어갔다. 2006년 박소희 원작의 ‘궁’의 성공을 필두로 TV는 점점 만화를 원작으로 삼는 경우가 많아졌다. 2009년부터 만화를 원작으로 삼은 KBS의 ‘꽃보다 남자’를 비롯해 ‘탐나는 도다’, ‘2009 외인구단’,  KBS의 ‘공부의 신’과 MBC의 ‘신이라 불리는 사나이’, ‘버디버디’, ‘대물’, ‘장난스런 키스’ 등이 제작 된 바 있다.

만화라는 미디어의 권력이 거대 미디어인 영상 쪽으로 흡수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만화는 웹툰이라는 새로운 활로를 찾았지만 그 단 열매를 맛보는 것은 일부 인기 작가이다. 대부분의 작품이 포털사의 배 불리기에 쓰인다는 불공정한 거래 관행 속에서 작가들은 힘이 빠질 수 밖에 없다. 황미나 작가도 화려한 세월을 뒤로하고 웹툰 시장에 뛰어들어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고자 했을 수도 있다. 그렇게 시작한 의욕적인 작품의 비슷한 소재가 인기 드라마에 나오는 것에 대해 자괴감을 느꼈을 수도 있다는 추측이다.

거대 자본이 투입되어 성공이 보장되어야 하는 TV 드라마나 영화의 특성상 트렌드나 대중의 욕구를 읽어내 익숙한 문법에 대입하는 기획의 단계가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에 표절 시비가 끊이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었다.

너의 이야기는 누군가의 이야기에 빚지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비단 TV나 영화 뿐 아닌 만화 업계 등 대중문화 전반에 걸쳐져 있는 특징이라는 것이 전문가의 의견이었다. 하늘 아래 새로운 이야기는 없으며 이야기는 그 전 이야기들의 ‘창조적 조합’ 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 모든 이야기는 자료의 검색으로부터 나오는데 그 환경이 같다 보면 자료가 같을 것이고 이야기도 유사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한 전문가는 “황미나 작가의 보톡스가 큰 얼개로 가지고 가는 ‘게임과 현실을 오가는 사랑이야기’는 2000년도 한국 영화 ‘후아유’와 같다. 하지만 누구도 황미나 작가의 웹툰이 후아유를 표절했다고 표현하지 않는다. 작품이 가지는 고유의 세계관이 다르기 때문이다” 라는 의견을 밝혔다.

같은 소재의 이야기가 넘쳐나지만 그 소재를 가지고 요리하는 창작자의 역량과 세계관에 따라 작품의 결이 달라지며 또 다른 이야기가 된다는 얘기다. 또 다르게 얘기하면 황 작가의 이야기도 장르 문법이나 과거의 이야기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지적인 셈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표절문제가 되풀이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같은 환경에서 서로의 에너지를 공유하며 열매를 맺어야 할 한국의 대중문화 업계가 어느 장르의 독식이나 박탈감이 아닌 서로 ‘윈윈’할 수 있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았다.

2007년 태왕사신기-바람의 나라 표절 논란

2007년 송지나 작가 배용준 주연으로 인기를 끌었던 MBC '태왕사신기'가 ‘사방의 신수가 왕을 수호한다’ 등의 일부 설정이 김진 작가의 만화 ‘바람의 나라’를 표절했다는 주장과 함께 법원까지 갔지만 법원은 송지나 작가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 사건은 만화업계에 상당한 충격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김진 작가의 바람의 나라는 한국형 판타지의 시초라 불릴 정도로 그 작품성이나 영향력 측면에서 가지고 있는 상징성이 크다. 그런 작가가 맘먹고 제기한 표절 소송이 그렇게 되었을때 만화 업계에서 갖는 위기 의식은 얼마나 컸겠는가” 라는 한 관계자의 말은 그 충격을 대변한다.

   
  ▲ (사진 위) 김진 작 '바람의 나라'(아래) MBC 드라마 '태왕사신기'  
 
위 사건을 '보톡스'-'시크릿 가든'의 표절 논쟁과 같은 선상에서 보기엔 무리가 있지만 거대 미디어와 약소 미디어의 파워 게임의 한 일단을 보여준다는 점에선 의미가 있다. ‘표절논쟁이 붙을 때 이기는 쪽은 인기 있는 쪽’ 이라는 한 관계자의 말은 많은 점을 시사한다. 보톡스와 시크릿 가든의 논쟁에서도 시크릿 가든을 접한 쪽의 수가 월등한 누리꾼들은 보톡스를 보지 않고 황 작가를 비판한다.

대중의 인기 있는 미디어 쏠림 현상은 방송미디어의 도덕적 불감증을 부채질 한다. ‘인기있으면 된다’ 라는 생각에 방송은 창작에 대한 투자를 등한시 하고 좀 더 쉬운 방법을 찾아간다. 오늘도 끊이지 않는 예능 프로의 외국 프로그램 짜깁기 논쟁 등은 이런 현상의 일단이다.

모호한 저작권법이나 표절에 대한 법적 기준도 문제라는 지적이다. 또 표절 논쟁도 인기가 있어야만 효용이 있는 한국 대중문화의 취약한 산업기반도 짚고 넘어가야할 부분이다. 한 관계자는 “표절논쟁도 화제가 되려면 그 작품이 인기있어야 한다”며 “문제삼을 부분이 차고 넘쳐나는데 상당수의 많은 창작자들은 누가 들어주겠어 하는 푸념속에 침묵한다” 고 현실을 꼬집었다.

한 관계자는 만화가 방송에 소재 제공을 하는 용도로라도 살아남아야 미래가 있다는 역설을 던졌다. 그렇기에 방송 미디어의 도덕적 자리매김과 약소 미디어에 대한 배려가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다. 어느 이야기도 서로에게서 자유롭지 못한 현실에서 기획단계에서 비슷한 이야기가 있으면 이 작품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식의 의견 표명부터 작품을 원작으로 삼아 저작권을 보장하는 방식이 두 미디어를 ‘윈윈’하게 할 것이라는 지적이다. 그렇지 않다면 결국 제기한 쪽도 거론된 쪽도 둘 다 상처 입는 표절 논쟁은 끊이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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