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경제부기자생활을 처음 시작한 것은 80년대 중반. 벌써 10년 가량 경제기자 노릇을 하고 있는 셈이다.

5공 후반기와 6공을 거쳐 현정부에 이르기까지 경제부만 있었던 관계로 요즘 벌어지는 비자금파문을 보고 있노라면 감회도 많고 착잡하고 씁쓸한 생각도 적지 않다.

80년대 경제기자 생활을 해본 사람이라면 모두 기억하겠지만 언론에 대해 재벌들은 적극적인 기업홍보는 커녕 무조건 한줄이라도 기사가 나가지 않는 것을 최상의 목표로 삼았다. 그만큼 정경유착과 비리로 기업의 약점이 많았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요즘의 재벌은 한마디로 그때와는 천양지차다. 재벌에 관한 비판기사는 으레 ‘못 나오는’ 줄로 아는 게 요즘의 재벌이다. 오히려 자기 기업PR성의 홍보기사들로 신문지면과 방송화면이 가득 채워지기를 사실상 강요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재벌이 이처럼 ‘거만해진’ 원인은 우선 재벌의 덩치가 그때에 비해 엄청 커졌고, 그동안 정경유착이나 비리경영 등이 많이 줄어 경영이 많이 투명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큰 원인은 기업규모 비대화에 따른 엄청난 광고물량 때문이라고 필자는 보고 있다. 삼성이나 현대그룹 같은 경우 큰 신문사 한곳에 나가는 연간 광고물량만 2백억원이 넘고 있다. 한 그룹이 신문사 전체 매출의 5%를 넘기고 있는 실정이다.

모 유력지는 재작년 모자동차회사가 불타는 사진을 실었다가 몇주간 광고를 중단당해 경제부장이 살살 빌어 겨우 광고가 재개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최근에는 한 석간지가 모그룹 총수의 뇌물혐의가 확인됐다는 기사를 먼저 게재했다가 광고 중단압력을 받았다.

그 석간지 경제부장이 해당그룹 홍보담당임원에게 전화로 ‘굽신거리며 사과하는’ 것을 바로 옆에서 목격하기도 했다.

이튿날 혐의사실이 공식발표되는 바람에 전세가 하루아침에 역전되기는 했지만 특정그룹에 대한 좋지 않은 기사라도 나올 경우 해당 그룹 임원회의 석상에서 “광고 끊어”라는 말이 서슴없이 튀어나오는 게 요즘의 현실이다.

사정이 이러다보니 노씨 비자금 파문이 터지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의 재벌총수는 거의 ‘군주’와도 같은 존재였다. 대통령보다 더 언론의 접근이 어려운 사람이 재벌총수다.

유력 언론사 기자라면 장관실은 쉽게 출입할 수 있지만 인의 장막에 가려진 재벌총수는 1년에 한번 만나기도 어려운 실정이다.

그러던 재벌총수들이 검찰에 줄줄이 불려가며 수모를 당한 것이다. 총수 측근들은 물론 기업의 전간부들이 동원돼 ‘제발 우리 총수만은 소환되지 않도록’ 총력로비를 벌이는 한편, 하는 수 없이 불려가게 되면 언론에 가급적 적게 취급되도록 또 로비를 벌였다. 요즘은 불구속기소된 총수를 가급적 법정에 적게 불려나가도록 로비공세다.

“우리그룹은 관계없고 ××총수가 구속된다더라”는 식의 흑색선전도 난무했다. 상대방 그룹의 흑색선전에 감정이 격해진 나머지 상대방 그룹비서실에 전화를 걸어 “정 그렇게 나온다면 당신 총수 비리를 정보시장에 퍼트려 버리겠다”고 반격하는 그룹도 있었다.

개인적으로 이번 비자금파문이 ‘특단의 재벌정책’을 다시 만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다. 요즘같은 때가 아니면 언제 재벌을 해부할 기회가 있겠는가. 그러나 정부는 소극적이고,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는 언론도 많지 않다.

(이 글은 조선일보 노조에서 발행하는 ‘조선노보’ 15일자에 게재된 내용을 필자의 양해아래 발췌 요약한 것임).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