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책을 생산할 수 있는 사회는 문화적으로 성숙한 사회이다. 그러나 이 문화적 성숙성은 저술가들의 힘만으로 달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책이 나왔을 때 그것을 따지고 평가하고 좋은 저술을 유통시킬 수 있는 사회적 수용 역량의 유무야말로 성숙한 문화의 기본 토양이고 환경이다. 그런 환경에서만 좋은 저술과 자랑할만한 작품의 지속적 생산이 가능하고, 탁월한 저술을 내놓을 줄 아는 사회만이 ‘선진사회’이다.

문화의 이 기본 토양을 일구는데 가장 긴요한 노력의 하나가 ‘서평’의 진작이라는 사실은 언급하는 일 자체가 구차할 정도로 매체 문화부의 문학, 학술, 출판 담당 기자들 누구나가 다 ‘아는’ 상황이다.

우리의 경우 서평의 빈곤이 문화적 스캔들로 지적된 것도 한두번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누구나가 다 그 중요성을 인정하는 서평이 신문 문화면 구성 풍속도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기묘하게도 그 중요성의 인식과는 완벽하게 무관하다. 말하자면 인식 따로 놀고 실천 따로 논다. 사정이 이러하다는 사실 역시 신문사 문화부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적어도 대신문사 문화부라면 한 나라의 문화적 성숙성을 키우기 위해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문화부 나름의 ‘정책’과 ‘비전’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서평은 문화면의 ‘정책적’ 칼럼이어야 한다. 그것은 가끔 한번씩 실리거나 어쩌다 실리는 식의 칼럼이 아니라 문화부가 마음 먹고 꾸미는 정기적 지면이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정책적이고, 수준급 서평 원고를 받기 위해 ‘투자’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정책적이다.

문화부는 서평 전문가들을 키워야 하고 서평 원고에는 최소한 현행 원고료의 4~5배를 지불해야 한다. 나도 마음 먹은 김에 말해버린다면 대신문사는 적어도 서평이라는 ‘직종’에만 종사하면서 살 수 있는 한두명의 전임 서평자를 갖고 있어야 한다. 차제에 이보다 더 큰 주문도 하나 내놓을까 한다.

우리 굴지의 신문들이 대학입시용 문제지를 낸다는 것은 세계 언론에 길이 남을 오욕이고 수치이다. 신문사들은 왜 이 부끄러운 짓을 일거에 청산하지 못하는가? “다른 데서 하니까”는 대신문의 구실이 되지 않는다. 우리 언론계는 “그런 것 내지 말자”라는 합의 하나 끌어낼 힘도 없는가?

다른 데서 하니까 다투어 입시문제지며 너절한 주간지를 내고 있기보다는 ‘다른 데서 하지 않는’ 더 의미있고 값진 일은 왜 못하는가? 이를테면 주간 서평부록 같은 것을 아담한 타블로이드판으로 꾸며내는 일은 우리의 대신문사 한두 군데에서 충분히 시도해봄직한 사업이 아닐 것인가?
< br> 런던 <타임즈>의 목요판 서평지(TLS)는 그 성향에 대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영국 지식인 사회를 키우고 유지하는 데 크게 기여했을 뿐 아니라 오늘날 영국을 대표하는 ‘얼굴’의 하나가 되어 있다. <뉴욕타임스>의 주간 서평지는 그 대중성에도 불구하고 역시 지금 미국의 간판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의 대신문사들이 주간 서평부록을 낸다면 그것은 물론 한동안은 타산성과는 관계없는 사업일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멀리 보았을때 그처럼 신문사에 좋고 사회에 좋고 문화에 좋은 일이 없을 것이다. 성숙한 독자를 갖는 신문, 그런 신문만이 신문이다.

도정일 (경희대영문과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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