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전직 대통령의 4천억 비자금 내역이 지난 19일 국회에서 민주당 박계동 의원의 폭로를 계기로 하나 둘씩 낱낱이 밝혀지면서 온 나라가 분노와 허탈감에 휩싸여 있다. 막강한 권력을 쥔 대통령과 그를 둘러싼 핵심 측근들의 치부를 위한 파렴치한 행동에 대한 ‘설마’라는 의혹이 ‘역시’라는 사실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검찰 수사가 뒤따르고 처음엔 완강하게 부인하던 연희동 노씨를 비롯한 측근 6공 실세들은 대책회의를 거쳐 대국민 사과문도 발표했다. 노씨는 “기업인들이 자발적으로 기부한 성금을 모아 5천억원의 통치자금(?)을 마련해 일부는 정당 운영비로, 나머지는 불우 이웃을 돕기 위해 썼을 뿐 개인적인 용도로는 단 한푼도 낭비하지 않았다”고 둘러댔다.

노씨의 변명으로 일관한 기자회견 내용을 말 그대로 받아들이는 국민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말로만 사죄 운운할 뿐 비자금의 조성 내역과 지출에 관해 자세한 설명이 없는 형식적인 기자회견은 그동안 수 없이 말을 바꿔온 노씨의 교활함에 환멸만 더해줘 후안무치한 그의 태도에 온 국민은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다.

지난 8월 3일 한 조간 신문을 시작으로 서석재 전 총무처 장관이 사석에서 기자들에게 발설한 전직 대통령의 4천억 비자금설이 각 방송과 신문 등 언론에 보도되면서 일반 국민의 관심사로 떠오르자 민자당을 비롯한 정부 여당은 서씨의 발언 내용이 보도내용과는 다르다면서 비자금설이 단지 시중의 루머에 불과하다고 파문을 조기에 가라 앉히기에만 부심했다.

이어 서석재씨의 사표가 전격적으로 수리되고 여론에 밀린 검찰은 모양새만 갖춘 수사끝에, 그것도 수사 착수 나흘만인 8월 12일, 전직 대통령의 4천억 비자금설은 근거없는 낭설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사실상 수사를 종결했다. 서씨의 발언이 보도된 지 불과 열흘도 채 안돼 각본에 의한 짜맞추기식 수사가 끝난 것이다. 여기에 방송은 수많은 의혹이 산적해 있는 상태에서 야권과 시민단체들의 진상 규명 요구가 강도를 더해감에도 불구하고 마치 약속이나 한듯이 보도를 그만 뒀다.

이후 방송은 8·15를 즈음한 대규모 사면 복권 소식, 민자당의 당직 개편 소식, 야당 후보의 선거 부정 표적 수사 등 총선을 대비해 지방 선거의 참패 충격에서 벗어나 정국 운영의 주도권을 잡으려는 민자당의 의도대로 보도를 계속해 왔다.

그 사이 방송사들은 사회 각계 각층의 5·18 광주 학살자 처벌을 위한 5·18 특별법 제정 요구 움직임을 철저히 외면했고 급기야 5·18 광주 학살자 가운데 하나인 노태우씨가 “중국 문화 대혁명에 비해 광주 사태는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망언까지 공식석상에서 당당하게 말할 정도로 극우 보수 세력들이 역사의 대세에 반발케 하는 분위기 조성에 일조했다.

이처럼 민실위가 최근 두 달동안의 방송 보도 태도를 새삼스레 지적하는 이유는 노씨의 4천억 비자금과 관련한 작금의 경쟁적인 보도 양태가 진정 언론인의 양심을 걸고 철저히 진상 규명을 하려는 방송사들의 자발적인 의지인지, 아니면 정치권 일각에서 우려하고 있는 것처럼 민자당이 주도하는 제 2의 인위적인 정계 개편 시나리오에 꼭두각시처럼 춤을 추고 있는지, 아무래도 석연치 않은 점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민실위에서는 각 방송사 기자들이나 편집진들이 노태우씨의 비자금 액수를 파헤치고 끈이 떨어진 과거의 실세들을 단죄하는 것 못지 않게 그 이면에 얽힌 정치적인 뒷거래, 즉 지난 대통령 선거에 들어간 정치자금의 유입 경로와 YS를 비롯한 민자당에서 갑자기 태도를 바꿔서 수사를 철저히 하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이유, 율곡 비리와 주택 2백만호 건설, 경부 고속 철도 사업, SBS 민방 특혜, 영종도 신공항 건설 등 6공 비리와 6공의 연장선상에 있는현 YS 정부에 대한 포괄적이고 총체적인 비리 고발에 역점을 둘 것을 제안한다.

이번 노씨의 비자금 수사가 어느 선에서 마무리될 지 아직 예측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이 문제가 원치않는 방향으로 자꾸 확산돼서 현 정권이 부담스러운 수위에 이를 때 검찰이 적당한 선에서 수사를 종결하리라는 것은 그동안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충분히 추측이 가능하다. 그리고 검찰이 이 사건에서 발을 빼면 언론 역시 언제 그랬냐는듯 꼬리를 감추게 될 것이다.

끝으로 한 방송사 편집회의에서 한 간부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던진 “노태우 전 대통령의 잘못이 그렇게 크다면 당시 청와대를 출입했던 기자와 대통령 기사를 키우기에 급급했던 편집 간부들도 단죄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떠올리면서 YS 정부 임기가 끝나는 그 시점에서 ‘어떤 말들이 우리들 사이에 오갈까’를 생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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