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정권은 언론에 대한 혹독한 통제정책과 함께 다양한 유인책을 통한 ‘당근 정책’도 병행했다. 정부의 언론유인정책은 언론인의 정치적 충원과 언론사에 대한 경제적 특혜 제공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특히 정치적 충원을 통한 언론인에 대한 개인적 혜택 제공은 이 시기에 와서 본격화되고 제도화된다.

언론인의 정치적 충원은 당장에는 언론인에게 정치적 출세를 보장함으로써 유인(誘因)을 제공하는 것이었지만, 언론인을 통해 언론인을 통제하는 ‘이언제언’(以言制言)의 한 방편으로 활용된 측면도 다분히 있었다. ‘이언제언’은 유신정권하 언론정책의 중요한 한 특징으로 자리잡았다고 할 수 있다.

언론인의 정치적 충원은 국회 충원과 행정부 충원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국회의 경우 언론인은 여당과 전국구의원 진출이 두드러진다. 유신국회로 불려졌던 9대 국회에 들어와서 유정회에 언론인 7~8명이 대거 들어갔다.

개인적 혜택제공 본격-제도화

유신헌법은 여당의 안정의석 확보를 위해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대통령이 추천하여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이 선출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이들이 이른바 유신정우회(유정회)이다. 문태갑(동양통신), 이종식(조선일보), 이진희(서울신문), 임삼(한국일보), 정재호(경향신문), 최영철(동아일보), 주영관(합동통신)씨 등이 유정회의 1기로 원내에 진출했다.

이들은 유신 이전에 청와대를 오랫동안 출입했고 정치부장으로 재직 중에 들어갔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당시 세 방송사를 제외하면 각 언론매체별로 한 사람씩 ‘선발’된 셈이었다.

이러한 각사별 배분방식은 뒤에 민정당에서 전국구와 지역구의원을 언론계에서 기용할 때도 원용됐다.

유신국회에 언론인을 각사별로 안배하여 진출시킨 것은 유신을 성공적으로 정착시키는 데 언론의 역할이 컸기 때문에 이에 대한 논공행상의 하나로 취해진 조치가 아니냐는 분석도 있다.

그리고 유정회라는 직능대표의 성격을 감안할 때 정치의 이론과 실제를 겸비하고 있어 특별한 사전훈련 없이도 금방 활용할 수 있는 인사들이 언론계에 많기 때문이라는 여건을 드는 이도 있다.

이러한 주장은 유신을 전후한 시기와 1980년 민정당 출범시에 언론인의 정계 진출이 두드러진다는 점에 착안하여 정권교체기나 정치적 격변기에 언론인이 ‘새 얼굴’의 풀(pool)이 된다는 점을 논거로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충원방식의 작위성을 감안할 때 언론인의 유정회 진출은 적극적인 협조에 대한 반대급부의 성격이 짙다고 할 수 있다.

언론인을 통해 언론을 통제하는 이른바 ‘이언제언’(以言制言)도 이 시기에 언론통제의 한 방편으로 정착하게 된다. ‘이언제언’이란 오랑캐로서 오랑캐를 친다는 ‘이이제이’(以夷制夷)에서 원용한 말로 언론계의 중진을 정부부처에 포진시킴으로써 이들을 통해 일선 언론인을 통제하고 무마하는 것을 빗대어 이른 말이다. 언론인의 행정부 충원은 이러한 ‘이언제언’의 차원에서 행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행정부에 충원된 언론인의 구성을 충원시의 직위별로 보면, 문공부 장차관 및 관리, 해외공보관과 문공부외 부처 장차관 및 관리, 대통령 비서관 및 보좌관, 대변인의 순으로 나타난다.

특히 정부대변인인 문화공보부장관에는 언론인출신이 대거 발탁됐다. 소위 혁명주체인 홍종철 장관(초대, 64.9∼69.4)을 제외하면 2대 신범식 장관(69.4∼71.6)부터 계속 언론인 출신이 문공부장관으로 임명됐다. 3대 윤주영(71.6∼74.9), 4대 이원경(74.9∼75.12), 5대 김성진(75.12∼79.12), 6대 이규현(79.12∼80.5) 등 1970년대의 문공부장관들은 모두 언론인 출신이었다.

70년대 문공부장관 언론인 독무대

언론계에서 국회 및 행정부로 충원됐던 언론인들은 나중에 다시 언론계로 복귀하여 언론통제의 일익을 담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언론사 출신으로서 제3,4공화국 기간 동안 국회와 행정부로 충원된 전체 언론인 중에서, 나중에 다시 언론사로 복직한 언론인의 수는 국회충원 언론인 14명과 행정부 충원 언론인 41명을 합친 총 55명이며, 이는 전체 충원언론인의 36.4%에 해당된다.

정치적 충원 언론인들이 충원후 언론사로 복직하는 경우, KBS, 서울신문, MBC 순으로 많이 복직했다. 이러한 현상 역시 언론인의 정치적 충원이 ‘이언제언’의 한 방편이었다는 점을 잘 드러내준다.

언론계로 복귀…언론통제 일익

한편, 정부는 1973년 3월 20일의 국무회의에서 각 부처의 직제를 개정하여 기존의 공보담당관을 공보관 즉 대변인으로 바꾸고 그 직급도 3급갑류에서 2급을류 또는 2급갑류로 격상시키면서 언론계인사를 한꺼번에 13명이나 기용했다.

대변인제를 신설한 것은 당시 문공부장관 윤주영의 발상에 의한 것이었다. 유신체제의 초창기였기 때문에 적극적인 홍보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낀 정부는 홍보전문가로 생각되는 각 언론기관의 차장급 이상 기자 13명을 각 부처 대변인으로 일괄 기용했다. 이것은 정부와 언론 사이의 관계변화를 나타내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정부가 국민에게 알리기를 원하는 정보만을 제공하겠다는 뜻이 강하게 작용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1976년 현재 대변인을 두고 있는 곳은 감사원을 포함해서 18개 부처이며, 이 가운데 외무부, 내무부, 국방부, 상공부, 문공부, 통일원 등의 6개 부처를 제외한 나머지 12개 부처의 대변인이 모두 언론계출신이다.

언론계출신 대변인들은 출입기자들에게는 어제의 선배 혹은 동료였다는 점에서 매우 거북한 상대였다. 기존의 공보담당관제도를 굳이 언론인 출신을 주축으로 하는 대변인제로 바꾼 의도는 명백히 ‘이언제언’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유신정권이 언론을 유인하기 위해 사용한 정책의 가장 큰 특징은 언론인의 정치적 충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언론인의 정치적 충원은 언론인에게 정치적 출세라는 미끼를 던져 언론인을 끌어들이고 나아가서는 ‘이언제언’을 꾀할 수 있는 일석이조의 장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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