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전대통령 비자금사건은 정치·경제 각 부문에 일파만파의 파장을 더해가고 있다.

워낙 그 전개의 폭과 깊이가 넓고 깊어지고 있고, 아울러 많은 의문점을 낳고 있어 섣불리 그 전개의 끝을 예측할 수 없는 형편이고 필자와 같은 일반인에게는 그 전모를 파악할 능력이 전혀 없다.

그러나 사건의 파장과 관계없이 초기 발단 과정에서부터 보여진 몇가지 문제점은 반드시 지적받아야 한다. 그 중 하나로 수사기관과 금융관계자들이 폭로 이전에 충분히 수사(조사)할 단서가 있었음에도 수사 착수에 이르지 않았고, 폭로 자체를 무력화 시키려고 했던 점과 아울러 정보 제공자에 대해 제재를 하려고 했던 점을 들 수 있다.

모두 알다시피 이번 사건의 공식적인 발단은 명의 대여자의 제보와 박계동의원의 폭로이지만, 그 비자금의 존재가 객관성을 확보한 것은 예금 잔고 조회서의 존재와 신한은행의 전 서소문 지점장 이우근씨의 비자금 존재 확인 발언이다.

그런데 폭로된 비자금에 대한 조사보다도 훨씬 발빠르게 은행감독원은 이우근씨를 조사해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긴급재정경제 명령위반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고, 검찰 신청의 압수 수색영장에도 혐의 사실로 이우근씨의 위 긴급명령 위반 사실이 기재돼 있다.

물론 위 긴급명령 제4조는 ‘금융기관에 종사하는 자는 명의인의 서면상의 요구나 동의를 받지 아니하고는 그 금융거래의 내용에 관한 정보 또는 자료를 타인에게 제공하거나 누설하여서는 아니된다’고 규정하고 있으나 위와 같은 규정의 취지가 비자금 같은 검은돈을 막자는 것이지 이를 보호하려는 것이 아님은 삼척동자도 아는 것이다. 그런데 은행감독원 등이 전 국민의 관심을 받는 비자금 사건에서 소극적으로 폭로 내용의 일부 사실에 관해 확인해 주는데 그친 이우근씨의 발언을 문제삼아 고발하고, 검찰이 마치 이에 주안점이 있는 양 압수수색의 근거로 삼은 것은 적절하지도 온당하지도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은행감독원은 금융실명제의 본래 의도에 관계없이 이우근씨를 조사한 후 조급하게 바로 이우근씨의 확인발언이 실명제 위반이라고 공표해 검찰에 고발 조치했고, 검찰도 이에 화합하는듯한 압수 수색을 행한 후 우연의 일치인지 금융기관 내부에서는 조사에 앞서 미리 비자금의 존재를 밝히는 용감한(?) 내부자는 더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은행감독원 등의 이와 같은 행위는 앞으로 이우근씨와 같은 내부자의 폭로를 막아보자는 이유 이외에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고, 실제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셈인 것이다.

이와 같은 경과만으로는 앞서 수많은 내부자의 폭로사건에서 보듯이(한준수 연기군수, 이지문 중위, 이문옥 감사관 등) 권력이 폭로직후 묵비─ 마지못한 시인─ 내부 폭로자에 대한 법적·비법적 제재를 통한 추가 폭로 방지와 초점흐리기─ 내부비리를 일과성이거나 우연한 것으로 치부함으로써 권력핵심과의 연결고리를 끊는 수순을 밟으려고 했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사회에 뿌리깊게 음성적으로 퍼져있는 구조화된 불법, 비리는 내부자의 제보없이는 개선하기 힘든 것인데 이제까지와 같이 내부자가 자신을 포함한 조직의 불법과 비리를 폭로할 경우 법의 보호는 커녕 법적 제재를 받는다면 극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내부비리를 폭로할 정도로 용감하지는 못할 것이다.

보다 투명하고 중립적인 권력행사 없이는 제2, 제3의 비자금 사건이 재발할 수 밖에 없고, 투명한 권력행사는 권력소유자의 선의만으로는 확보될 수 없는 것으로 결국 그 확보책의 하나로 내부 비리 고발자에 대한 법적 보호 장치가 시급히 마련돼야 할 것이다.

이미 서울시의회에 내부 비리 고발자(양심선언자)에 대한 보호를 규정한 조례제정 청원이 접수돼 있는 등 시민사회 단체를 중심으로 입법화를 위한 노력이 경주되고 있는 바 국회 차원에서도 이러한 움직임이 필요하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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