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언론은 진정 ‘사건’을 두려워 하는 것일까.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는 최근 ‘한때 길들여졌던 한국 언론이 전직 대통령에게 대들고’ 있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한국언론이…김영삼 대통령과 야당 지도자들을 포함한 정치지도자들의 ‘더러운 돈’ 관련 혐의를 과감하게 추적하고 폭로할 수 있다면…(이는) 한국언론이 ‘성인’이 되는 사건이 될 것이다”고 평가했다.

더 나아가 “한국 언론은 전통적으로 힘을 가진 자들이 취약해지지 않는 한 그들을 비판하거나 추적 취재하는 일을 기피해왔다”며 “이들 언론이 짖어대는 만큼 철저히 물어뜯을 지는 여전히 불확실하다”고 내다봤다.

남의 나라 언론에 마치 ‘개’를 빗댄듯한 무례한 비평이 결코 달가울리 없다. 괘씸하고 불쾌하다. 그러나 한편으론 겉으로 드러내놓고 화를 내기에는 어딘가 찔리는 데가 있는 게 우리 언론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실제 우리 언론의 일그러진 모습은 김 대통령의 비자금 부인 발언에 대한 보도 태도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대부분의 신문이 아무런 문제제기 없이 “대선자금을 받은 적 없다”는 발언을 그대로 1면 주요기사로 처리했을 뿐이다.

심지어는 대선자금 논란을 “본질과는 먼 곳에서 소요를 확대하고 해결방법과는 무관한 문제들을 재생산하여 핵심을 흐리고 미궁에 빠지게 만드는” 것으로 규정하고 ‘모든 것이 검찰에서 밝혀질 것’이라는 김 대통령의 발언을 “통치의지를 담은 발언”이라고 추켜올리기까지 했다(서울신문 사설).

그러나 신문들의 이러한 침묵은 김대중 총재가 20억원을 받았다고 밝혔을 때와 사뭇 대조적이다. 당시 신문들은 ‘한심한 일’ ‘부덕한 행위’ ‘김 총재의 전락’ 등과 같은 용어를 써가며 일제히 비난을 퍼부은뒤 “탄로날 것이 두려워 미리 선수치기를 했다”며 그 동기를 의심하거나 “과연 20억원 뿐이겠느냐”는 의문을 던지는 데 서슴지 않았다.

그렇다면 당연히 김 대통령 발언에 대해서도 “김영삼 대통령이 92년 노씨의 민자당 탈당이후엔 노씨를 만난 일이 없었다고 했지만 제3자를 통해 대선자금을 지원받을 수도 있다. 또 당시 노씨와 민자당간의 관계를 생각해도 자금유입가능성은 배제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왜 굳이 검찰 수사후에야 밝힌다고 고집하는가. 자기들은 안밝히면서 성역없는 수사를 외치니까 앞뒤가 안맞는 인상이다”(중앙일보 사설), “직접 받지는 않았다는 얘기인지 다른 당직자를 통했다는 뜻인지 알 수가 없다”(경향신문 사설)는 지적이 나와야 했다. 이미 김윤환 대표도 “집권당 총재가 후계자에게 자금을 지원한 것은 관례”라고 하지 않았는가.

검찰 수사에 영향을 주지 않기 위해서라고, 검찰의 독립성을 보장해 주기 위해서라는 논리를 들이댈 수도 있다. 그렇다면 김 대통령의 발언 하나하나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이를 대서특필하며 ‘사법처리 시사’ 운운함으로써 검찰의 수사방향보다 정치권의 입장을 중시했던 것은 왜였는가.

이러한 언론의 태도에는 이번 사건을 단순히 ‘노씨 개인의 부정’ 차원에서 바라보는 단순한 사고가 깔려있지 않나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김 대통령이 “비자금이 아닌 부정축재”라고 규정하자 언론은 이를 무비판적으로 받아 보도했다. 이어 신문 지면 곳곳에 ‘비자금’ 대신 ‘부정축재’라는 용어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부정축재’란 단지 개인의 부도덕성만을 드러낼 뿐이며 나아가 부를 목적으로 돈을 부정하게 모은 것에 초점을 한정한다.
이제 그 사용처는 시야에서 사라지며 단지 돈의 조성과정에만 눈길이 쏠릴 뿐이다. 이 용어가 암시하고 겨냥하는 게 분명해진다. 그것은 다름아닌 이번 사건의 축소다.

그러나 손바닥으로 해를 가릴 수는 없다. 결코 이번 사건은 노씨 개인의 부정도, 과거의 치부만도 아니다. 그것은 정치권의 심각한 부패가 집약된 것이며 권력과 자본 간의 오랜 검은 거래가 이뤄낸 합작품이다.

또한 그것이 지금까지 드러나지 않고 온존해 있었다는 점만으로도 바로 현재의 문제며, 그 처방에 따라 우리의 장래가 달라질 수 있다는 점에서 미래를 좌우하는 문제다.

언론 또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언론은 노씨와 관련해 자신들이 질타하고 있는 바로 그 부패체제의 한 부분이 되어왔다”는 <파이낸셜 타임스>의 말이 아니더라도 우리 언론이 부패의 한 공범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렇게 더럽혀진 손을 이제라도 씻기 위해서는 비자금의 조성과정 뿐만 아니라 그 사용처까지도 ‘성역없이’ 과감하게 추적하고 폭로해야 한다.
비로소 우리 언론이 ‘성인’이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에 왜 ‘사건’을 마다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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