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씨의 비자금 파문 이후 이와 관련한 보도가 연일 신문과 TV를 뒤덮고 있다. 각 언론사들은 최대한 다양하고 많은 정보를 내보내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취재역량을 가동하고 있다.

이번 비자금 보도는 국민적 여론을 환기시켜 검찰과 정치권이 실체적 진실을 규명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는 긍정적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 여론도 비교적 성실하게 전달하려는 노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번 비자금 보도 가운데는 유난히 ‘설’에 가까운 내용이 많아 독자와 시청자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설’을 그대로 보도하는 것에서부터, 오보, 미확인 보도, 추측보도가 적지 않아 오히려 문제의 핵심을 어지럽게 하는 부작용을 낳고 있기도 하다.

중앙일보 10월 27일자엔 <“신한은행 계좌 김옥숙씨 것” 설 제기>라는 기사가 실렸다. 같은 날자엔 그 밖에도 <남편보다 통 컸던 청와대 ‘안방마님’ 씀씀이> <노씨 민정계가 더 욕한다―야박한 돈 사용 … 사후 관리도 거의 안해>라는 기사가 실렸다. 주로 노씨와 그의 부인 김씨의 인격적 약점을 꼬집는 기사들이었다. 이 기사들은 전 청와대 주변인물들이나 인구에 회자되었던 소문에 근거해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이런 류의 기사들이 확인하기 힘든 소문에 근거해 있다는 점이다. 소문을 기사로 썼다는 사실은 자칫 독자들로 하여금 제대로 취재된 기사도 소문일지 모른다는 오해를 부르게 된다. 기사 전체의 신뢰성을 반감시키는 것이다. 물론 끓어오르는 국민적 분노를 생각할 때 노씨와 김씨의 약점을 들춰내는 것은 차라리 일종의 카타르시스마저 느끼게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러나 언론이 노씨 비자금 문제를 ‘설’에 근거한 가십 차원으로 다루게 됐을 때 독자들은 이 문제를 사회적 역사적 맥락에서 보지 못하고 지극히 개인적·인간적 차원에서 보게 될 위험성마저 배제할 수 없다.

10월 22일자 각 일간지가 보도한 <신한은행 서소문 3백억 주인 사채업자설> 보도는 22일 전 청와대 경호실장 이현우씨가 검찰에 출두함으로써 전혀 근거없는 소문으로 확인되기도 했다. ‘설’ 보도가 갖는 위험성을 극명하게 증명한 사례다.

그밖에도 <4백85억은 이현우씨 돈?>(한겨레 26일자), <한보 정태수 회장 ‘5, 6공 정권 특수자금 관리설’>(조선 25일자) 등의 ‘설’ 보도가 있었다. 한겨레신문은 10월 26일자 가판 1면 머리에 <이원조씨 검찰 출두>라는 기사를 게재했다. 오보였다. 가판을 내보낸 후 재확인 과정 결과 오보임이 판명돼 이 기사를 황급하게 배달판에서 빼버리는 사태가 연출됐다.

추측기사가 결과적으로 오보로 판명되는 경우도 있었다. 중앙은 23일자에 <노전대통령 오늘 입장 밝힐 듯>이란 기사를 게재했다. 그러나 노전대통령은 4일 뒤인 27일에 가서야 입장을 밝혔다. 같은 신문 25일자엔 <노씨 빠르면 내일 검찰 소환조사 받을 듯>이란 기사가 실렸지만 노씨는 일주일 가까이 지난 30일 현재 소환조사를 받고 있지 않다. 중앙일보는 26일자에도 <노씨 금명 소환조사>란 기사에서 소환시기를 26~27일로 예측했지만 이 역시 맞지 않았다.

미확인 보도도 속출했다. 미확인 보도는 그 성격상 확인이 되면 특종일 수도 있지만 오보일 수도 있는 양면성을 갖고 있다. 그만큼 위험부담이 따를 수밖에 없다. 조선일보는 10월 26일자에 은행감독원 관계자의 말을 빌려 <동화·상업은행 은닉했던 노씨 비자금―은행감독원, 작년 2천억 적발>이란 기사를 게재했다. 은행감독원을 출입하는 다른 신문사 기자들이 이 기사를 보고 확인을 하려했지만 어느 곳에서도 확인이 되지 않았다.

경향신문 21일자 <상업은행 효자동 지점 92~93년 ‘비자금 금고’, “수백억대 계좌 상당수 관리”>, 중앙일보 24일자 1면 머릿기사 <신한은 본점에 2백20억 또 있다> 등의 기사들은 검찰과 정치권의 발표에만 의존하지 않겠다는 탐사보도로 평가되긴 하지만 그 사실여부가 아직도 확인되지 않고 있다.

박계동의원이 비자금을 폭로한 이후 박의원이 여권 고위층으로부터 비자금 정보를 받았다는 ‘설’이 퍼지기 시작했다. 민자당 민주계와 민주당 사이에 모종의 커넥션이 있는 것 아니냐는 암시를 풍기면서 이 ‘설’은 계속 증폭됐다. 그후 이 ‘설’은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총재가 20억 수수 사실을 시인한 것을 기점으로 정계개편설로 굳어져갔다. 민주계·민주당·정치개혁시민연합의 <신3당통합>이란 말까지 등장하고 있다.

물론 이번 비자금 파문을 통해 정치판이 새로 짜여질 가능성이 적지 않다는 게 정계의 분석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직도 노씨에 대한 수사가 진행 중이고 노씨 처리문제도 결말이 나지 않은 상황에서 언론이 가능성만을 갖고 여기에 골몰한다면 결국 노씨의 비자금 문제를 엉뚱한 방향으로 끌고갈 위험성도 있다. 신중하게 가능성은 제시할 수 있지만 초점을 흐릴 정도까지 치달아선 곤란하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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