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직 태통령인 노태우씨의 비자금 사건이 온나라를 뒤흔들고 있다. 방송 뉴스와 신문보도는 온통 노태우 비자금으로 도배를 하고 있고 사람들도 둘 이상만 모이면 비자금 이야기로 꽃을 피운다. 이 사건으로 화폐의 가치개념에 혼란이 생겼고 모든 잘못을 노태우씨에 빗대어 욕하면 될만큼 노태우씨의 비자금 문제는 지금 모든 이들의 공분을 사고 있다.

이번 사건은 정치권의 비리에 대해 냄비처럼 끓다가 이내 식어버리던 과거의 모습과 비교해 보면 자못 그 파장이 오래 간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사건의 파장이 오래가는 이유는 이 문제를 둘러싼 각종 비리와 사실이 연이어 터져나오는 현재진행형 사건이기 때문일 뿐이다.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못할 때 이 사건에 대한 관심이 언제까지 갈 것인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생각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더군다나 이 사건을 계기로 정치권의 비자금 관행이 사라질 수 있다는 바람에 대해서는 더더욱 회의적일 수 밖에 없다.

사실 그런 노태우씨를 뽑은 사람도 우리 국민이고 노씨의 비리를 방조한 것도 우리 언론이라고 비판한다면 우리는 작히 할말이 없다. 언론이란 밝혀진 사실을 근거로 칼을 들이대는 역할만을 부여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 숨겨진 사실을 밝혀내는 것이 1차적인 임무이기 때문이다.

청와대나 안가 깊숙한 곳에서 비밀리에 이루어지는 비리를 어떻게 밝혀내느냐고 반문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 언론사들 중에 6공때 벌어진 수서사건을 몰랐거나 보도하지 않은 방송, 신문사는 없다. 단지 수서사건에 가려져있는 최고 권력층의 비리와 배임에 대해 누구도 밀착취재하지 않았을 뿐이다.

대통령이 기업으로부터 막대한 액수의 뇌물을 받은 것도 그렇다. 현대그룹의 명예회장인 정주영씨가 정치에 참여하면서 상납액수와 함께 상납사실을 분명하게 밝힌 적이 있다. 단지 그런 발표에 대한 사실여부를 언론이 치밀하게 밝혀내려 하지 않았을 뿐이며 그 개연성에도 불구하고 크게 문제삼으려하지 않았을 뿐이다. 오히려 청와대 기자회견이나 정부여당의 발표를 여과없이 보도했던 것이 당시 언론의 모습이었다.

그뿐인가. 통치자금이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더더욱 큰 반성이 필요하다. 5공이래로 집권여당의 운영비는 대통령의 호주머니에서 나왔다는 것이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5, 6공 당시에는 국고보조금이 없거나 큰 도움이 되지 않았고 지정기탁금이라는 것도 여당의 막대한 당운영비와 선거자금을 고려해보면 부족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어느 언론사도 그 액수를 취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문제점조차 지적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그저 관행으로 치부하고 넘어갔을 뿐이다. 노태우씨가 비자금을 통치자금이나 관행이라고 발뺌한 것을 비판하려면 우리가 먼저 관행이라는 주장에 대해 다리를 걸고 넘어갔어야 했던 것이다.

과연 그때는 밝히지 못하고, 그때는 비판하지 못했던 것을 지금에 와서는 왜 이처럼 신랄하게 비판할 수 있는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노씨는 전직 대통령이기때문이다. 현직에는 약하고 전직에는 강한(그것도 현직이 전직을 공격하고 나설때만) 언론의 약점때문에 이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현직에 약한 언론의 모습은 현재에도 적나라하게 나타나고 있다. 우리언론은 여전히 선거자금을 비롯해서 현직 대통령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는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

관행과 현실론으로 위장한 비리의 싹은 잘라야 한다. 그럴려면 전직의 비리도 물론 잘라내야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현직의 비리를 자르는 일이다. 현직의 비리를 자르지 않는 이상 비리는 또다시 관행의 탈을 쓰고 좀더 새로운 방법으로 계속될 것이다.

우리가 워터게이트 사건을 밝힌 미국의 언론이나 록히드사건을 파헤친 일본의 검찰에 대해 박수를 보내는 것은 그들이 현존하는 권력에 칼을 댔기 때문이라는 것을 언론이든 검찰이든 깊이 되새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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