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정치’는 참으로 독특한 매력(?)이 있다. 국민의 시선을 사로잡으면 힘들여서 정책개발하고 실행에 옮기지 않아도 정치적 이득을 얻을 수 있다. 국민이 실체를 알기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리기에 단기간 ‘변화의 모습’을 각인시키는 데는 효과적일 수 있다.

‘친서민 정부’가 그렇고, ‘공정사회’가 그렇다. 대통령과 청와대 참모, 여당 지도부가 이런 얘기를 꺼낼 때마다 시민단체나 학자들은 그 진정성에 의혹의 시선을 보내지만, 여권 지도부는 쏠쏠한 매력의 언어정치를 멈추지 않는다.

언어정치가 성공하려면 언론 도움이 필수적이다. 언론이 깐깐한 시선으로 ‘친서민 정부’의 실체와 ‘공정사회’의 역설을 따져나가면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에는 ‘언론 도우미’들이 즐비하다.

   
  ▲ 조선일보 10월 27일자 사설.  
 
적당히 말을 꺼내면 그럴듯하게 포장해주는 언론들이 있으니 ‘언어정치’는 더욱 빛을 발한다. 그러나 내용이 담보되지 않은 ‘언어정치’는 결국 부메랑이 될 수밖에 없다. 국민을 언제까지 ‘눈속임’으로 상대할 수 있겠는가.

한나라당이 또 다른 언어정치를 시험하고 있다. 지난 26일 안상수 한나라당 대표의 국회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 나온 얘기이다. 한나라당이 ‘개혁적 중도 보수’ 정당으로 다시 서겠다는 다짐이다.

흥미롭다. ‘개혁’ ‘보수’ ‘중도’ 조화로울 것 같으면서도 전혀 엉뚱한 이 단어를 조합해 한나라당의 변화를 얘기하고 있다. 주인공은 안상수 대표이다. 안상수 대표의 두 개의 얼굴이 있다.

하나는 서슬 퍼렇던 1980년대 전두환 정권 시절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실체를 세상에 알린 ‘용기 있는 검사’의 모습이다. 변호사 시절에는 한겨레와 경향신문 필진에 참여할 정도로 색깔 있는 법조인이었다.

또 다른 단면은 ‘행방 불명’ ‘입영 기피’ 등 공직자로서 어울리지 않는 군 면제 사유의 주인공이다. 이 때문에 그는 누리꾼 사이에서 ‘행불 상수’라는 달갑지 않은 애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안상수 대표 관련 기사가 나올 때 어김없이 등장하는 댓글은 ‘OO야 군대가자’라는 내용이다. 그만큼 누리꾼 사이에서 그는 관심의 대상이다. 하지만 안상수 대표는 집권 여당 대표로서 자리하고 있다. 군 면제 대통령, 군 면제 국무총리와 함께 군 면제 여당 대표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간첩 잡는 이들의 수장인 ‘국가정보원장’도 군 면제이다.

안상수 대표의 ‘언어 정치’는 어느 정도의 신뢰성 있는 약속으로 볼 수 있을까. 한나라당이 개혁적 중도보수 정당으로 다시 서겠다는 그 약속 말이다. 한나라당이 진정으로 그 길로 간다면 이는 주목할 대목이다.

문제는 말이 아닌 실천이다. 한나라당이 진정으로 그 길로 갈 것인지, 갈 생각이 있는지, 아니면 ‘언어정치’의 달콤함을 맛 본 뒤 폐기 처분할 것인지 지켜볼 일이다.

흥미로운 대목은 보수언론의 대표임을 자부하는 조선일보가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다는 점이다. 27일자 지면에 <‘개혁적 중도보수 정당 한나라’의 정체성>이라는 사설을 실었다. 조선일보는 중요한 얘기를 했다. 경청할 대목이다.

“한나라당은 자신들이 지향하겠다는 중도가 무엇이고, 보수가 무엇이고, 개혁이 무엇인지 분명한 개념부터 국민에게 제시하고 그에 맞춰 강령을 바꾸는 것이 순서다.”

맞는 얘기 아닌가. 말이 아닌 실행 계획을 구체적으로 보이라는 것이다. 조선일보가 한나라당 정체성 변화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을까. 그렇지는 않다. 냉소와 걱정이 앞서는 모습이다.

조선일보는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 사람들은 지금까지 자신들을 보수라고 내세운 적이 별로 없다. 보수라는 단어조차 쓰기를 꺼려왔다”고 지적했다.

흥미로운 평가이다. 분석이다.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은 그러면 무엇이라는 말인가. 중도인가. 진보인가. 이명박 정부는 보수정부인가. 아니면 무엇인가. 정체성도 모호한 정부인가. 그런 정부에 나라살림을 맡겼단 말인가.

조선일보는 사설에서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에 대한 걱정과 분노, 아니 냉소의 심경을 감추지 않았다.

“보수의 진실, 보수의 정의(正義), 보수의 정체성을 모르기 때문에 보수의 자존심조차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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