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허, 낭패로다, 낭패야. 모든 과거를 화끈하게 봐주기로 하고 그동안 온갖 욕을 먹어가면서도 줄줄이 불기소처분을 내려왔건만 결국 단군 이래 최대 부패비리사건으로 잡아넣지 않을 수 없게 생겼으니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이왕 이렇게 된 것, 이번에는 위에 눈치볼 것 없이 철저히 한번 파헤쳐볼까? 나라고 직업적 욕심이 왜 없으랴만서도 그렇게 해서는 여전히 목이 근질근질한 것이 안심이 안되는구나. 함승희도 그랬고 홍준표도 그랬지. 아서라, 정신차리자. 내가 언제 마음내키는대로 사는 무책임한 존재였나.

두달전 비슷한 사실이 폭로되었을 때만 해도 서석재 장관을 날려보내면서까지 그 분을 보호해 드리는 일에 매달렸던 내가 아니었던가? 그러고 보니, 새 정부 들어서도 국가안보와 경제안정을 위해 무던히도 수사축소와 진상은폐 노력을 계속해 왔구나. 동화은행비자금사건 때와 한전비리사건 때가 그랬고, 율곡사업비리사건 때도 그랬구나.

기왕지사 애국하며 살아온 것, 이번에도 초지일관 애국적으로 수사할 일이다. 그분도 애국하는 마음으로 수사받겠다고 하시지 않았던가? 아, 이제야 대선자금공개, 재계소환범위등 난제가 싹 풀리면서 앞이 훤히 보이는구나.’

왠지 요즘엔 이와 비슷하게 중얼거릴 검사가 적지 않을 것으로 생각이 드니 내가 막가고 있는 것일까? 아마도 12·12 기소유예결정, 5·18 공소권없음결정, 삼청교육대 불기소결정, 광주청문회 위증 공소권없음결정등 일련의 5·18관련 불기소결정들을 내리면서 지금까지 전두환, 노태우등의 유혈쿠데타책임을 묻지 않기 위해 애써온 검찰로선 지난 5공청산과정에서의 전두환 일가 부패비리 사건에 이어 최근 노태우 일가의 부패비리 사건을 지켜보면서 역시 5·18내란학살의 원죄를 다스리지 않고는 이들의 부패비리 여죄를 제대로 다스릴 수 없다는 우리의 판단에 동조하고 있을 듯하다.

또한 처음부터 무리인 일을 간신히 덮어오다 이렇게 되었으니 체면이 말이 아니구나 하면서 탄식과 공분을 삭이고 있을 검사도 있을 터이다.
어쨌건 검찰의 이번 노태우 부정축재사건 수사와 관련하여 두어가지만 지적하고 넘어갔으면 한다.

우선 검찰은 이번 수사의 공정성 시금석이 야당지도자가 아닌 대통령과 집권당에 흘러간 대선자금 액수를 규명하는 데 있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다음으로 검찰은 이번 노태우 사건을 개인 비리가 아닌 구조적 비리로 인식하고 수사목표를 처음부터 단순한 노태우 사법처리를 넘어 정경유착의 혁파 및 예방으로 잡아야 한다.

이렇게 볼 때, 노태우의 비자금조성과 부정축재비리를 막았어야 할 공적 권한과 책임을 갖고 있었던 모든 6공 권부 핵심들과 실세들을 소환수사하여 직무유기 책임을 묻는 것은 물론 이권과 특혜를 위해 검은 돈을 갖다바치고 그것을 관리까지 해준 일부 재벌들을 가차없이 사법처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권부핵심들의 오만방자와 재벌들의 준법책임, 기타 사회적 책임을 확립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게 된다. 이 대목에서 나는 검찰이 재벌들의 최근 자정결의를 원용하여 재벌봐주기를 할 가능성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많은 사람들은 이미 검찰의 향후 태도에 대해 기대를 버린 지 오래다. 대통령의 고교후배가 검찰총장인데 뻔할 뻔자지 뭘 바라겠느냐는 냉소와 불신이 확 깔려있는 것이다. 하기야 믿기 잘하는 천성을 가진 나로서도 민주노총의 출범에 즈음해 최근 검찰이 하는 짓거리를 보면 정말 못믿을 검찰, 못된 검찰, 못난 검찰이라는 단정이 절로 나오는 것을 피할 수 없다.

45만명의 노동자로 구성된 국내 최초의 자주적 노총에 합법성을 부여하지 않는 것도 기가 막힌데 거기에 더해 무슨 기부금품모집금지법에 따라 민주노총회관 건립기금 계좌를 압수하고 핵심지도부를 수배, 검거하는 따위의 구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이게 도대체 어느 나라의 검찰이란 말인가?

특히 단군 이래 최대의 권력형 정경유착사건으로 전국이 들끓고 있는 판에 명색이 문민시대의 검찰이 이따위 짓거리를 한다는 것은 넌센스의 극치다. 재벌대기업의 준법, 기타 사회적 책임이 말로만 이행되는 것이 아닌 이상 누군가가 그것을 추궁하고 확보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가장 일차적인 수단은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조합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 그렇다면 최근의 노태우 비자금조성 및 부정축재사건을 맞아 검찰은 오히려 민주노총에 대해 대기업들의 각종 비리에 대한 고발운동을 전개해주도록 호소하는 것이 마땅한 것이 아니겠는가.

한마디로 우리 검찰은 아직 조금도 바뀌지 않은 채 개혁대상 영순위를 자랑한다. 그런데 검찰이 정권의 눈치나 보며 편파적으로 검찰권을 행사할 때, 법의 권위는 서지 않는다. 군부독재시절이라면 그래도 별로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가 탈군사화를 하면 할수록 기댈 것은 일차적으로 법의 권위일 수 밖에 없다.

이런 뜻에서 김영삼 정권의 일차적 책무, 특히 사법개혁에서의 일차적 책무는 검찰의 중립성을 도모하는 방향으로 검찰개혁을 착수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영삼정권은 무슨 이유에선지 검찰개혁을 게을리해왔다. 그 결과 왜곡된 법치중추기관을 그대로 둔 채, 법치를 부르짖는 모순을 범해왔다. 이제 김영삼 정권은 노태우 비자금 사건을 통해 다시 한번 사회전반에 개혁분위기를 확산시킬 수 있는, 다시 없을 기회를 맞게 되었다.

김영삼 정권이 이번 기회를 엄정한 검찰권 행사를 통해 법의 권위를 회복하고 나아가서 노동권 보장등 실질적 민주화로까지 나아가는 계기로 삼을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정치적 입지 강화를 위해 정략적으로만 이용할 것인지는 스스로의 야합성과 그로 말미암은 각종 잘못들을 정직하게 시인하고 이번 기회에 새 출발을 할 용의와 각오가 있는지에 달려있다.

검찰 역시 스스로의 과오를 반성하는 차원에서, 또한 김영삼 정권의 참회와 반성을 강제하는 차원에서 이번 사건에 대해 한점 의혹없는 수사를 다해줄 것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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