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역사 공부는 방송사에서 하고 있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역사 드라마가 일반인의 역사 인식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 비단 드라마 뿐 만이 아니다. 역사를 소재로 삼은 소설과 다큐물들 역시 일반인의 역사 이해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사극이나 역사를 소재로 한 소설, 심지어는 역사 다큐 까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엄밀한 검증 없이 이를 왜곡하거나 과장하는 일이 많아 일반인의 역사 인식을 오도하고 있다는 지적도 많다. 주진오 상명대 교수(역사콘텐츠학과)는 최근 면밀한 역사적 검증을 통해 신경숙 작가 등의 소설과 방송 다큐멘터리를 통해 개화기 때 비운의 궁녀로 대중에게 소개된 ‘리진(혹은 ‘리심’)이라는 인물이 사실은 전혀 허구의 인물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지난 21일 연세대  국학연구원에서 ‘파리의 조선 무희 리진의 역사성’을 발표한 주 교수의 기고글을 싣는다. 주 교수의 이 논문은 '역사비평' 2010년 겨울호에 실릴 예정이다.<편집자 주>

최근 들어와 팩션 (Faction)이라는 새 단어가 우리 삶에 친숙하게 되었다. 이제 대중들은 역사학자들의 저서나 논문, 역사 교과서를 통해 역사지식을 얻기보다 이들 팩션 작품을 통해 역사를 소비한다. 사실상 한국의 대중들의 역사교사는 작가나 방송국의 PD, 감독들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학자들은 대부분 무관심하지만, 관심을 갖더라도 완성되어 방영되거나 잘 팔리고 난 다음에서나 비로소 개입하여 이미 별다른 영향을 미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들 가운데 처음부터 드라마임을 강조하는 경우도 있지만 최근의 추세는 교묘하게 사실고증을 철저히 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 더욱 문제를 심각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다.

리진, 역사적 인물이 되다
 
2006년 신경숙은 조선일보를 통해 ‘푸른 눈물’이라는 소설을 연재하였다. 그런데 그해 김탁환이 같은 인물을 주인공으로 ‘파리의 조선 궁녀 리심’(민음사)이라는 세 권짜리 소설을 출간하였다. 한편 신경숙은 ‘리진’ (문학동네)으로 제목을 바꾸어 두 권으로 펴냈다. 당시 두 소설은 각각 베스트셀러 자리를 차지했으며 모두 영화화될 예정이라고 선전하였다.

사실 19세기 말 궁중 무희 출신의 조선 여성으로서 프랑스 공사와 결혼하여 파리로 가서 살다가 다시 조선에 돌아와, 다시 옛 신분으로 돌아가게 되자 결국엔 자살을 택하게 된 비극적인 그녀의 삶은 충분히 극적인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여성의 존재에 대한 서술은 오직 2대 주한 프랑스 공사였던 이폴리트 프랑뎅(Hippolyte Frandin: 法蘭亭)이 쓴 책 ‘En Coree’(코리아에서)에만 수록되어 있다. 프랑뎅이 유일하게 남긴 기록을 바탕으로 김탁환, 신경숙 두 작가는 현지답사를 비롯한 고증작업과 문학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작품을 완성하였다.

그런데 이 시기를 연구해 온 역사학자로서 흥미로운 소설을 접하면서, 그리고 두 소설의 출발점이 되고 있는 프랑뎅의 서술에 비약과 왜곡이 너무 많아 보였다. 도무지 그 시기의 역사상과는 너무나 많은 거리가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하나하나 면밀히 검토해 보기 시작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2007년 6월 23일 KBS의 <한국사 전(傳)-조선의 무희, 파리의 여인이 되다>(연출 김종석)편에서 리진을 실존 인물로 간주하여 방송을 한 것이었다. 오늘날 위키피디아를 비롯한 여러 인터넷 사이트에는 리진이 하나의 항목으로 버젓이 자리잡고 있는 것은 그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 2007년 방송된 KBS <한국사 전(傳)-조선의 무희, 파리의 여인이 되다>(연출 김종석)편.  
 
프랑뎅과 ‘En Coree (한국에서)’

이폴리트 프랑뎅은 1852년생으로서 1924년에 사망하였는데 1892년 4월 8일 2대 프랑스 공사로 부임하였다. 그는 2년 정도 조선에서 근무하다가 1894년 3월 휴가를 얻어 귀국했다가 결국 돌아오지 못했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그의 외교역량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부정적이었으며 외교관으로서 별다른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그런데 그가 집필한 책(명지대 LG-연암문고 소장)은 제목 그대로 프랑뎅이 ‘한국에서’ 겪은 사실도 있지만 일부는 간접적으로 들었던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의 조선 인식은 지극히 오리엔탈리즘에 입각한 부정적인 것이었다. 그는 조선을 중국과 유사한 나라, 폐쇄된 국가, 외부와 단절된 나라, ‘은둔의 왕국’으로 묘사하였다. 또한 프랑뎅은 한국인을 미개하며, 수동적이고 노예근성이 있으며, 권력의 노예. 비합리적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가 판단하는 조선의 문명화는 가톨릭의 전파에 의한 것이었다.

플랑시 공사는 누구이며 리진의 남자일 수 있는가?

프랑뎅은 이름을 밝히지 않았지만 자신의 전임자로서 다시 조선에 부임한 사람으로 설명하였기 때문에 그에 해당하는 사람은 콜랭 드 플랑시 공사 밖에 없다. 따라서 두 소설 및 다큐는 ‘젊은 대리공사’를 플랑시로 단정하고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고 있다.

그는 1853년생으로서 1887년 말에 초대 주한 프랑스 공사에 임명되어 1891년 6월 15일까지 서울에서 근무했다. 그 후 1893년까지 일본주재 프랑스 공사관의 1등 서기관으로 근무하다가 1893~1894년 프랑스 외무성 본부로 전입되었다. 그 후 모로코의 탕헤르에서 잠시 일하다가 1896년 4월 아관파천 이후 다시 한국에 전권공사로 부임하여 1906년 1월까지 10년간을 근무했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로 인쇄된 책으로 알려진『직지(直指)』를 수집하여 프랑스로 가져간 인물이기도 하다.

우선 지적할 것은 프랑뎅이 분명히 그 대리공사가 리진과 결혼을 했다고 기록했는데 분명히 콜랭 드 플랑시에 대한 공식기록에는 그가 미혼이었다고 적혀 있었다. 게다가 프랑뎅은 분명히 자신이 조선에서 리진을 보았고 다시 프랑스에서 만났다고 적었다. 그런데 프랑뎅이 1892년 4월 조선에 도착했을 때에는, 플랑시가 이미 1891년 6월에 일본으로 떠난 뒤였다. 따라서 두 사람은 함께 조선에 있었던 날이 전혀 없었고 따라서 그가 리진을 만났을 가능성도 전혀 없었다.

리진, 과연 실재했던 인물인가?

   
  ▲ (왼쪽) 신경숙의 '리진'의 삽화, 오른쪽 김탁환의 '리심'  
 
그런데 두 소설 모두 리진을 궁중 무희이자 궁녀로서 그리고 있다. 그런데 프랑뎅은 그의 글에서 리진을 궁중의 기생이라고만 적었다. 원래 궁중무희는 궁녀가 아니다. 관기로서 외방여기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궁중 연회에 선발되었다가 끝나면 수고비를 받고 다시 원래 소속으로 돌아갔다. 더욱이 여악이 실행되는 것은 내명부를 위한 연회뿐이었다.

더구나 프랑스 공사가 직접 리진을 달라고 고종에게 ‘요청’하는 일이 실제로 일어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국의 이익을 대변하는 외교관의 신분으로 자국과 수교한 상대국가에게 외교상으로 큰 결례를 범하는 무례한 일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러한 일이 외교관의 본국에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그의 외교관 경력에도 매우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침에도 불구하고 몸소 스캔들을 자처하는 외교관도 없을 것이다.

또한 홍종우의 경우 프랑스로 갈 때, 조선정부에서 발행한 여권을 소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리진이 콜랭 드 플랑시를 따라 프랑스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여권이 필요했다. 당시 프랑스 공관원들도 물품을 국외로 반출하는 것도 일일이 조정에 보고했던 기록이 『법안(法案)』 즉, 프랑스와 주고받은 외교문서에 자세히 나와 있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리진이라는 이름도, 다른 조선 여인이 프랑스로 출국했다는 기록이 나오지 않는다.


‘리진’ 관련 주요 일지

1888년 6월 콜랭 드 플랑시. 초대 주한 프랑스 공사 부임

1890년 12월 한국인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 홍종우, 파리 도착

1891년 6월 플랑시 공사, 일본주재 프랑스 공사관으로 이임 (‘리진’과 동행)

1892년 4월 이폴리트 프랑뎅, 2대 주한 프랑스 공사 부임

1893년 5월 플랑시, 프랑스 외무성 근무를 위해 귀국

1893년 7월 홍종우, 프랑스를 떠나 일본으로 떠남

1894년 3월 홍종우, 중국 상하이에서 김옥균 저격

1894년 3월 프랑뎅 공사, 휴가차 프랑스로 출발하여 돌아오지 않음

1894년 7월 청일전쟁 시작

1894년 10월 플랑시, 모로코 탕헤르로 부임

1895년 10월명성황후 시해사건

1896년 2월 아관파천

1896년 4월 플랑시, 3대 주한 프랑스 공사로 부임

(리진 동행. 귀국 후 리진은 노비인 궁중 무희로 다시 복귀하여 자살)

1905년 프랑뎅, 『En Coree (한국에서)』를 프랑스에서 출간

1906년 1월 플랑시 전권공사 주 태국 공사로 이임

*괄호 안의 줄친 부분은 프랑뎅의 『En Coree (한국에서)』에 언급된 ‘리진’ 관련 서술
 


리진을 다시 기생으로 만든 고관은 누구인가

그런데 프랑뎅의 책에는 그 공사가 다시 대한제국으로 파견 명령을 받아 서울로 귀환하자 리진에게 ‘앙심을 품고 있었던 고관이 옛 궁중 기생이 귀국한 사실을 알아내어’ 그녀를 다시 ‘노비’로 만들어 버렸다고 하였다. 이 고관을 양 소설 모두 홍종우라고 지목하고 있다.

홍종우는 한국인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으로서 1890년 말부터 1893년 7월까지 머물렀다. 그는 파리에서 춘향전과 심청전 등을 불어로 번역하는 일을 도왔다. 따라서 그가 리진을 프랑스에서 만났을 가능성은 없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그의 관직에 대한 기록을 보아도 아관파천 이후인 1898년 1월에 가서야 다시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그 관리는 홍종우일 수 없다.

팩션, 그리고 오도된 역사 다큐의 폐해

그렇다면 도대체 프랑뎅은 왜 이러한 이야기를 지어 낸 것일까? 지금으로서 명확하게 알 길은 없다. 하지만 그가 낸 책의 저자가 그 만이 아니라 끌라르 보티에 여사와의 공저이며 그것도 그녀의 이름이 앞에 나와 있다는 점에 주목하게 된다. 그녀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이 찾으려 애를 썼으나 아직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런데 책 내용의 대부분은 프랑뎅이 한국에서 체험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공사까지 지낸 외교관이 책을 집필할 문장력이 없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보티에의 역할이 바로 프랑뎅이 쓴 글을 윤문하면서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내용 바로 리진과 관련된 부분을 써낸 인물은 아닐까 생각된다. 그렇지 않다면 그녀가 이 책의 공동저자 나아가 대표저자가 될 이유를 도무지 찾을 길이 없는 것이다.

프랑뎅에게 있어서 조선은 비상식적이고 사악한 제도를 갖고 있는 미개한 나라였다. 리진이라는 존재를 통해 조선은 프랑스보다 도덕적으로 저급한 문명을 갖고 있는 나라이며 나약한 여성의 영혼을 억압하여 방황하게 하는 나라였던 것이다. 리진은 다만 그런 조선의 모습을 호소력 있게 만드는 훌륭한 장치였다.

그의 오리엔탈리즘에서 나온 허구는 21세기의 한국에서 성공적으로 먹히고 말았다. 한국을 대표한다고 자부하는 소설가들이 두 사람이나 그의 짤막한 서술을 바탕으로 장편 소설을 써냈다. 심지어 정통 역사 다큐멘터리를 자처하는 KBS의 [한국사 傳]을 통해 당당히 역사적 인물로 자리를 잡았다.

두 작가는 후기를 통해 공통적으로 자신들이 얼마나 리진의 흔적을 찾기 위해 많은 노력과 현지답사를 거쳤는지를 밝히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리진이 아니라 엉뚱하게도 플랑시를 따라 다녔을 뿐이다. 오히려 그들의 현지답사 강조가 독자로 하여금 이 소설을 고증에 충실한 역사소설로 오인하게 만들었다.

그 점이 더욱 문제인 것이다. 독자들은 이 소설을 단순히 소설가의 문학적 상상력에 입각한 소설이라고 보지 않고 역사 그 자체로 인식할 수밖에 없게 하는 것이다. 더욱 이상한 것은 집필 과정에서 도움을 받은 분들에 대한 감사의 글에 역사학자는 단 한사람도 없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두 소설은 오리엔탈리즘에 입각하여 저술한 프랑뎅의 글을 제대로 확인해 보려는 노력없이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들이 센세이셔널리즘적으로 저술함으로서 대중들의 역사지식에 많은 혼란을 가져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가 이같은 비판을 하는 것은 다양한 역사소재를 바탕으로 문화콘텐츠 들이 대중들과 더욱 친숙해 지는 것에 반대하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찬성하고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역사 비전문가일 수밖에 없는 작가와 감독들이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역사학자들과의 사전 참여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이미 방송되고 있는데, 출판되어 팔리고 있는 소설에 대해서 뒤늦게 문제제기를 해 보아야 영향력은 거의 없다. 그러는 가운데 대중의 역사지식은 매체의 권위를 내세워 허구를 사실로 믿게 만드는 제작자들에 의해 오도될 수밖에 없다. 과연 그 해악은 누구의 책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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