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이 수백억원의 로비자금을 노전대통령에게 건네주었을 것으로 보고 수사에 착수하고 있는 한보그룹의 수서택지 특혜분양사건에 김영삼대통령이 90년 당시 민자당 대표로 직간접적으로 연관돼 있다는 사실이 그때의 언론보도를 통해 확인되고 있다.

91년 2월 21일 세계일보가 특종 보도한 ‘민자당 수서 공문서 3종 확인, 서청원의원 문서변조’ 보도에 따르면 90년 7월 20일 당시 김영삼 민자당 대표는 김종필, 박태준 민자당 최고위원들과 함께 “수서 택지를 특별 분양해주는 것이 좋겠다”는 민자당의 민원처리 검토의견서에 최종 결재를 해준 것으로 돼있다.

수서택지 특혜분양 수사에 나선 검찰의 자료 요구에 민자당은 이 자료를 제출하면서 ‘민자당이 수서택지를 특별분양해주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리고 김대표와 두 최고위원들의 결재를 받았다는 내용’을 고의로 삭제, 제출했으나 세계일보의 이날 보도로 이같은 문서변조 사실이 드러나게 됐다. 어찌됐건 김대통령은 당시 민자당 대표로서 수서택지 특혜 분양에 직접 연관된 것이 드러난 셈이다.

김영삼 대표는 이에 대해 “민원관계 결재서류란 얘기만 듣고 평소의 관행에 따라 서류를 보지 않고 서명했다”고 해명했으나 더욱 시사적인 대목은 수서택지 특혜분양사건에 청와대가 깊이 개입돼 있다는 사실을 언론에 흘린 것 역시 김영삼대표 측근이었다는 점이다.

이는 김대표측이 그때에 이미 수서특혜사건의 전말을 비교적 상세하게 파악하고 있었다는 점을 확인해주는 것으로 김영삼대통령이 이번 노전대통령의 비자금 사건에 대한 ‘성역없는 수사’를 강조하기 전에 먼저 이같은 점에 대한 분명한 해명이 요구되는 대목이다.

수서택지 특혜분양에 청와대와 평민당등이 개입했다는 사실이 폭로된 것은 91년 2월 3일, 세계일보가 1면 머릿기사로 수서택지 특혜분양에 대한 청와대와 평민당의 협조공문과 그 내용을 보도했다. 이 기사를 특종 보도한 당시 세계일보 이용식 기자(현 문화일보 정치부장 직대)는 93년 11월 펴낸 <김영삼권력의 탄생>이란 책 ‘수서사건의 진실’ 편을 통해 취재 경위등을 상세히 밝히고 있다.

이 기자는 이 책에서 91년 2월 2일 당시 김영삼 민자당 대표의 비서진들과 식사를 하다 우연히 수서사건의 비리에 대해 얘기를 듣게 된 것이 특종 보도의 계기가 됐다고 밝혔다.
내각제 개헌을 성사시키려는 공안파의 음모설과 여권내의 수구파의 움직임등에 대한 이야기 끝에 한 비서가 “청와대를 공격할 수 있는 자료를 입수했다고 하는데 이번 국회(1월 21일 20일간의 회기로 열린 임시국회)에서 거론될지 모르겠다”고 말한 한마디가 단서가 됐다는 것.

이 비서의 귀띔으로 수서 특혜 물증을 가지고 있었던 김대표의 핵심 측근이었던 B의원을 만나 수서 택지분양에 관한 청와대 협조공문등 결정적인 물증을 확보, 보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세계일보의 보도가 있자 조선, 한국, 한겨레등이 1면 머릿기사로 받았다.

그 다음날 수서사건은 전 신문과 방송을 타고 걷잡을 수 없는 불길로 번져나갔다. 언론들의 취재경쟁에 불이 붙으면서 수서사건은 단순한 특혜의혹이 아닌 청와대 핵심이 개입한 것으로 윤곽이 잡혀져갔다.

그러나 검찰의 수사가 진행되면서 이 사건은 청와대가 직접 개입한 권력형 비리에서 한보그룹의 뇌물공여 사건으로 변질되기 시작했다. 검찰은 수서택지 분양 과정의 외압에 대한 추적보다 한보그룹의 비자금 추적쪽으로 몰아갔다.

검찰은 2월 18일 종합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사실상의 수사종결을 선언했다. 검찰은 이 사건을 청와대의 장병조 비서관과 이태섭, 김동주등 국회의원등이 한보그룹에 뇌물을 받고 특혜분양을 도와준 것으로 결론을 내려버렸다.

노대통령은 19일 담화를 통해 “일부 공직자나 정치인들이 구시대의 발상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데서 이러한 부정이 저질러졌다”며 자신은 전혀 이 사건과 관련이 없음을 기정사실화했다. 20일자 각 신문들도 ‘의혹 남긴 채 수사 종결’ 등의 보도로 사실상 손을 떼기 시작했다.

민자당이 ‘수서택지를 특혜분양해주는 것이 좋겠다’고 결론을 내리고 ‘김영삼 민자당 대표등이 결재했다’는 사실을 고의로 은폐한 서청원의원의 민자당 공문서 변조사실을 세계일보가 21일 1면 머릿기사로 내보냈으나 역부족이었다. 검찰과 다른 언론은 굳게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리고 26일 걸프전 발발과 함께 수서사건은 갖가지 의혹을 남긴 채 미궁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김영삼 대표는 2월 8일 노대통령과의 주례회동을 마치고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청와대 개입의혹에 대한 언론의 집요한 추적에 불만을 토로하기도 하고 수서 촌지와 연루된 언론에 대한 ‘성역없는 수사’가 이뤄질 것이라며 언론에 경고를 보내기도 했다.

노 전대통령의 비자금 사건에 대한 ‘성역없는 수사’를 강조하고 있는 지금의 김영삼 대통령을 볼 때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 것으로 김대통령이 수서 특혜사건의 축소및 은폐에 앞장섰다는 비난을 면키 어려운 대목이다. 당시 민자당 대표라는 위치를 감안하더라도 역시 김대통령의 해명이 필요한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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