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7월,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의 치열함이 정점을 향해갈 때, 당시 이명박 후보는 한 연설에서 청중을 향해 ‘믿습니까’를 외쳐댔다. 친박 진영과 야권에서 쏟아져 나온 각종 의혹에 명쾌한 해명을 내놓는 대신 자신에 대한 믿음을 주문했다.

2010년 10월, 이명박 대통령은 천안함 사건에 대한 정부 조사결과가 불신에 봉착하자 예의 그 ‘믿음’을 꺼내들었다. ‘대한민국에 살면서 천안함 사건이 북한 소행이 아니라고 믿는 것은 정말 아니라고 생각한다.’ 대통령이 천안함 사건을 종교의 영역으로 이해하고 있지는 않은지 우려를 자아내는 발언이었지만 한 언론사가 바로 다음날 그럴 듯하게 화답했다.

   
  ▲ 지난 15일 밤 방송된 KBS <뉴스9> 톱뉴스  
 
10월 14일 KBS 9시 뉴스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천안함 사건은 북한 소행이 맞다. 북한 권부에서 스스로 인정했으므로 남한에서 더 이상 왈가왈부 하는 것 자체가 우스워진다. 대체 어떤 내용이기에? KBS는 북한 김정일 위원장의 장남인 김정남이 지난 8월 아버지를 만나 동생 김정은이 천안함 사태를 일으키도록 왜 묵인했냐고 항의했다’고 보도했다.
 
김정남의 중국인 측근이라는 인물의 주장을 전한 보도였다. 공영방송 KBS가 9시 뉴스 머리기사로 다뤘으므로 뭔가 믿을 구석이 있다고 봐주고 싶지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근거가 없는 뉴스다. 김정남의 ‘천안함 항의’를 전한 이는 뉴스에 변조된 목소리로 등장할 뿐 왜 그의 말을 믿어야 하는지 어떠한 설명도 KBS는 하지 않았다. 그가 정말 김정남의 측근인지, 얼마나 가까운 측근인지, 그가 어떻게 김정남 부자의 대화 내용을 알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다.

게다가 김정남이 드물게나마 언론과 직접 인터뷰를 해왔으며, 최근에는 ‘3대 세습 반대’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혔다는 점에서 KBS 뉴스는 취재원의 등급과 내용의 신뢰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설사 김정남이 직접 ‘천안함 항의’를 했더라도 그것이 사실에 기초한 항의인지 권력 다툼에서 나온 정치적 항의인지 구별할 수 없는, 원천적으로 내용 확인이 불가능한 소재의 뉴스였다. 그럼에도 KBS의 확인할 길 없는 특종은 수많은 언론에 인용되면서 확대 재생산됐다. 그 과정에서 어떤 언론사도 사실 확인은 하지 않았다. 전형적인 ‘아님 말고’였다.

   
  ▲ 지난 7월 한국 언론이‘북한의 천안함 사건 개입을 암시한다’며 대대적으로 다뤘던 포스터.  
 
10월 15일 KBS 뉴스는 북한 포스터 한 장을 보도했다. 북한군이 주먹으로 군함을 두동강 내는 내용으로, 이미 지난 7월 국내 언론이 ‘천안함 사건을 암시한다’며 대대적으로 다뤘던 포스터였다. KBS는 군사법원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한나라당 의원이 이 포스터를 들어보이자 마치 처음 본다는 듯 ‘천안함 연상 북한군 포스터 공개’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9시 뉴스 앵커는 ‘천안함 사건이 자신들의 소행임을 암시하는 북한군의 선전 포스터가 공개됐다’고 말하고 큼직한 자막으로 ‘북 해군이 한방 때렸다’라고 했으니 KBS의 재탕은 실수라기보다 고의에 가깝다. 기사에 ‘일부 공개되었던 것을 이번엔 전부 공개했다’는 문장을 넣어 첫 공개가 아니라는 사실은 밝혔지만 뒤늦은 정정이었고, 의미 없는 정정이었다. 이미 7월에 전부 다 공개되었던 포스터임을 KBS만 몰랐거나, 모른척 하는 것이다.

실수든, 고의든 KBS의 이러한 보도는 ‘북한이 했다는데 무슨 논쟁이 더 필요한가?’라는 여론을 만들어 내는데 동원되고 있다. 더 이상 천안함 사건이 논란의 대상이 되길 원치 않는 정부가 가장 바라는 보도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이명박 대통령의 ‘믿습니까’에 KBS는 ‘믿습니다’라고 화답한 셈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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