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일보 노조(위원장 장지태) 공정보도위원회가 5·18 민중항쟁과 관련한 과거 부산일보의 보도내용을 12월21일 전면공개하고 나서 관심을 모으고 있다. 공보위가 공개한 내용은 80년 당시와 5·6공화국, 김영삼 대통령 재임시까지의 5·18 관련 보도들이다.

5·18 관련 첫 기사는 80년 5월21일 1면 <광주소요 6명 사망>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이 기사는 민간인 1명과 군경 5명이 희생됐다며 계엄사의 발표를 고스란히 옮긴 것이었다. 5일후 ‘피의 도청진압’을 하루 앞둔 26일자 사설은 ‘차츰 평정을 되찾고 목포시위도 수그러져 가고 있으나 일부 과격한 데모대원들이 다시 경화되어 도청을 점거, 장기투쟁을 선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두환씨가 국보위를 통해 신군부의 최고 실권자로 드러나면서 ‘전두환 신화 만들기’는 극에 달한다. 8월8일자 1면 머릿기사 <미, 전두환장군 지지>에 이어 11일자 3면 해설에선 ‘미국의 전장군 지지는 광범한 국민지지에서 연유한다’고 밝혔다. <공산침략 막기위해 군이 정치일선 나섰다>며 환영했고 <개혁의 산실-국보위>(8월14일자)의 노고도 잊지 않았다.

8월27일 전씨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자 <정화된 새역사의 장>이 열렸음을 알렸다. 8월14일자 <김영삼 퇴진 의미-막내린 구 정치>는 역사의 아이러니와 함께 변신능력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8월13일자엔 삼청교육대와 관련, <속죄의 땀으로 씻은 검은 과거…새사람 되어 새역사 참가>라고 행진곡을 울리고 무더기 해직 사태에 대해선 <직장·지역에 정화열풍>이 분다고 반겼다.

5·18의 진상에 관한 기사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88년부터다. 5·18추모제·기념집회 관련 기사가 등장했고 5월 16일부터는 6회에 걸쳐 <광주사태-그늘에 묻힌 한의 역사 짚어 본다> 시리즈를 게재했다.

그러나 93년 5월13일 김대통령이 “5·18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역사에 맡기자”고 말한 바로 다음날 ‘진상규명 주장이 암울했던 시절의 치욕을 다시 들춰내 갈등을 재현하거나 보복적 한풀이를 해야 응어리가 풀어진다는 강박관념의 소산만은 아닐 줄 안다’며 ‘광주는 지금 용서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고 여론을 호도했다.

이제 전, 노씨가 구속된 현재엔 같은 사안에 대해서 ‘헌정질서를 파괴하고 수많은 양민을 학살한 죄에 대한 처벌은 어느 누구에 의해 자의적으로 폄하되거나 축소될 수 없는 사항’(12월4일자)이라고 말을 바꾸었다.

신문의 논조 또한 마찬가지. 부산일보 노조는 11월24일 특별법 제정 발표 다음날자 사설이 ‘우리는 (…) 진상규명과 관련자 처벌만이 암울했던 군사독재의 구시대를 청산하는 길이라고 누누이 지적해왔다’고 강변, 집권자의 의중에 따라 표변해온 논조 왜곡의 은폐를 시도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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