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을 예술에 비유하면 ‘종합예술’이라 할 수 있다. 언론이란 ‘작품’은 한 개인이 아닌 다수의 노력을 요하며 사회의 일부분이 아닌 전체를 조망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때문에 이 종합예술을 완성하는 데는 다양한 위치에서 다양한 역할들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어떤 때에는 군대보다 더 엄격한 위계질서 속에서 일사불란하게 한 호흡으로 움직이는가 하면 각기 나름의 시각과 개성으로 ‘빛나는 작품’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언론인들의 ‘하루’를 밀착 취재, 우리 언론의 속내를 살펴본다.


12월 21일, 조선일보 최청림 국장(54)은 연희동 자택에서 여느 때와 다름없이 새벽 5시 30분 조간신문과 아침 뉴스를 체크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아니 시작했다는 표현은 틀린 것일지도 모른다.

최국장은 이 시간에 전날 만든 ‘조선일보’라는 결과를 다른 조간신문이나 뉴스와 비교, 평가해야 하기 때문이다. 놓친 기사는 없는지, 밤새 자신이 체크하지 못한 큰 사건은 없는지. 신문제작과 평가라는 하루의 사이클이 이 시간에 마침표를 찍는다.

아침
7시 30분 아침식사. 하루 중 부인과 두 아들을 마주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시간이다. 거의 가정을 ‘방치’하다시피 할 수 밖에 없었던 자신의 기자생활을 견뎌주고 믿어준 식구들의 미더움이 느껴진다.
그러나 최국장의 마음은 기상할 때부터 벌써 신문사로 향해 있었다.

이 시간대는 야근자와 출근자가 근무 교대를 하면서 자칫 공백이 생길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최국장의 경험으로는 미국 케네디 대통령이나 중국 주은래 수상의 사망 등 굵직한 외신뉴스가 이 시간에 발생했다. 이런 대형뉴스가 터지면 즉각 호외 발행을 지시해야 한다.

그리고 9시 출근길. 연희 교차로를 지나 연세대 앞을 지나오면서 승용차 안에서 새삼 자신의 몸을 바라본다. 요 몇년 사이 부쩍 배가 나오고 몸이 무거워졌다. 피곤하다는 이유로 아침운동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어나 5분 동안 맨손체조를 하기는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절대 운동량에 미치지 못한다. 예전엔 집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목욕탕까지 일부러 걸어가 아침 목욕을 하기도 했는데, 이젠 운동을 해야겠다고 마음만 먹었지 몸이 잘 움직이지 않는다.

9시 30분 신문사에 도착. 이때부터 하루의 긴장이 시작된다. 건강을 챙기지 못했다는 생각도 까맣게 잊어 버린다. 10시부터 일일 편집회의 주재. 최국장을 비롯해 각 부서의 부장단들이 모두 참석해 오늘 예정된 주요 기사를 보고한다.

오늘은 전두환씨 반란혐의 기소가 가장 큰 뉴스다. 별다른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 한 머릿기사는 일단 이걸로 가기로 한다. 수학능력 시험 결과 발표 내용, 정치권 사정, 김영삼 대통령 새내각 첫 회의 주재도 국민적 관심이 쏠린 기사들이다. 굵직한 뉴스가 풍성하게 차려진 하루다.

아무래도 기존의 뉴스면으로는 다 소화하기엔 부족할 것 같다. 관련 뉴스에 3개 지면을 확대하라고 지시한다. 31면에 전두환씨 관련 공소장 전문을, 34· 35면에 수능결과 발표를 게재하기로 결정한다.

사회부장으로부터 사회부 정재연 기자가 백담사에 머물고 있는 이순자씨 인터뷰를 추진하고 있다는 보고도 받는다. 이씨의 목이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잠겨 인터뷰가 가능할지 모르지만 일단 이씨 쪽에서 긍정적 반응을 보였다는 내용이다.

이씨의 인터뷰는 입장에 따라 전씨의 처지에 대한 동정심을 유발할 가능성도 있지만 반대 논리도 담아야 한다는 게 최국장의 생각이다. 국민은 개혁을 바라면서도 한편으론 개혁을 불안해 하는 이중심리를 갖고 있다. 반대논리를 외면한다면 국민의 정서를 온전하게 반영한 것일 수 없다.

요즘 조선일보를 두고 ‘반YS’ 신문이란 얘기도 도는 모양이지만 최국장은 특별히 어느 정권에 유착하거나 반대한다는 생각은 갖고 있지 않다. 신문은 정권적 차원이 아닌 국가적 차원의 한 주체이기 때문이다.

예정된 내용 이외도 일선 기자들이 뜨끈뜨끈한 뉴스를 낚아올리기를 기대하면서 편집회의를 마쳤다. 11시 대학을 아직 졸업하지 않아 기자 수령장을 받지 못한 수습기자 4명에게 수령장 전달.


12시 점심시간. 오늘은 서울대 김세원교수와 서강대 김병주교수, 이규성 전 내무장관과 약속이 돼 있다. 이들은 최국장의 ‘경제통’들이다. 중국집에서 이들을 만나 오랜만에 자장면과 탕수육을 시켜 먹는다. 가볍게 맥주도 한잔 곁들인다. 최국장은 가끔 단합을 위해 편집국내 간부나 기자들과 자리를 같이 하기도 하지만 가급적 식사나 술자리는 외부인사와 갖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사람 만나서 얘기하는 속에서 정보와 기사가 나오기 때문이다. 더구나 취재라는 공식적인 자리보다 점심이나 술자리와 같은 사적인 자리에서 속내가 더 잘 드러나는 법이다. 최국장은 그런 의미에서 요즘 젊은 기자들이 술자리를 피하는 게 안타깝다.

맥주가 몇 잔 돌려지자 자연스럽게 얘기가 나온다. 내년 경제 전망에 대한 예측, 새내각 경제팀의 성격 등. 기자들이 취재해온 기사가 얼마만큼 사회적 흐름을 반영한 것인가를 알기 위해 최국장은 늘 이런 ‘감각’을 잃지 않으려고 한다.

다시 신문사에 돌아오면 오후 편집회의가 기다리고 있다. 오전에 예정됐던 기사들이 어떻게 취재되고 있고 지면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반영시킬 것인가를 결정하는 회의다. 정치권 사정 기사는 더 구체적 정황을 설명해가며 쓰기로 한다. 이와 관련해 분명한 팩트가 잡힌다면 금상첨화인데. 5면에 게재할 외부 원고가 청탁 방향과 맞지 않는다. 문화부장이 이를 대체하는 칼럼을 쓰기로 한다. 이순자씨 인터뷰가 성사됐다는 보고도 받는다.

편집회의가 끝나자 마자 2시40분 ‘티타임’이 기다리고 있다. 오늘은 방상훈 사장과 안병훈전무, 김대중주필, 임백 출판국장이 함께 했다. 티타임은 말 그대로 차한잔 마시면서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하는, 일견 신문사에선 한가해 보이는 시간이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오가는 세상 얘기와 정보의 질마저도 한가한 것은 절대 아니다. 한 분야의 전문가들끼리 느낄 수 있는 무게가 한담 속엔 배어 있다.

티타임이 끝나고부터 3시30분에서 5시까지가 그래도 최국장으로선 자유로운 시간이다. 데스크 탑에서 출고된 기사를 스크린하는 게 이 시간대의 주업무다. 간혹 지인과 방문객이 찾아오거나 기사와 관련된 사람들이 항의를 하러 오기도 하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잠잠하다.

마침내 5시. 1판에 나갈 기사를 마감하는 시각이다. 1면 및 각면의 머릿기사와 버금머릿기사(사이드 톱)를 결정해야 한다. 오늘은 큰 고민없이 ‘전씨 반란혐의 기소’를 머리로 결정한다. 이렇게 큰 기사가 있는 날은 고민이 덜하지만 그만그만한 뉴스만 있는 날은 머리를 정하는데 피가 마르지 않을 수 없다.

저녁
7시 1판 제작. 부장들과 1판을 들고 리뷰회의를 다시 진행. 이 때면 다른 신문의 가판과 비교해가며 이른바 벤치마킹을 한다. 조선일보에서 놓친 기사는 없는지. 이 사진의 앵글이 이상하게 맞춰져 다른 사진으로 대체할 것을 지시한다. 이 기사의 제목은 좀 명확하지 않다. 다르게 바꿔보도록 한다. 국제면의 영국 다이애나 세자빈 관련 기사는 사람들이 많이 궁금해 하는 만큼 더 키우도록 한다.

오늘은 ROTC 1기 동창회의 송년회가 7시에 있는 날이다. 최국장은 몇 해 동안 모임에 나가지 못했다. 동창들이 이번에도 안나오면 벌금을 물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은 터였다. 최국장은 허물없이 반말과 농담을 나눌 수 있는 그들이 그립기도 하다. 2시간이나 늦어 눈치가 보이기는 하지만 송년회가 있는 강남인터컨티넨탈 호텔로 들어선다. 벌써 마주앙에 배갈에 술이 몇 순배 돌았다.

최국장은 후래자 삼배라고 친구들이 따라주는 술을 거푸거푸 마신다. 최국장은 방우영 회장이 손꼽는 ‘술꾼’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지금은 방회장이 최국장을 기억했을 때만큼 술을 많이 들지는 못한다.

최국장은 70년대 중반 동료기자와 술을 마시다 동료기자의 여동생집을 요정인 줄 알고 여동생에게 “네가 마담이냐. 이쁜 색시 없냐”고 했던 일화도 갖고 있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셔 기사 한장 쓰고 토하고 쓰고 또 토하고 해 “다 토하면 그때 기사가 다 끝난다”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동창들과의 만남을 아쉽게 뒤로 하며 다시 밤 11시 편집국을 들러 새롭게 바뀐 기사를 보고 12시 귀가. 무거운 몸을 눕힌다.

새벽
1시가 지났을까. 야근조장 김명제 차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김차장은 검찰에 나가 있는 기자로부터 새정치국민회의 김병오의원이 전격 소환돼 조사를 받았다는 보고를 전달했다. 최국장은 보고를 받는 순간 술이 확 깼다. 정치권 사정과 관련한 구체적 팩트가 처음으로 잡힌 것이다. 판단을 내려야 했다.

현재 43판을 인쇄중인 윤전기를 멈추고 개판을 해야 할지, 43판은 그냥 찍고 다음 판부터 김의원 관련 기사를 집어넣을지. 윤전기를 멈추면 김의원 관련기사를 더 많은 양의 신문에 넣을 수 있지만 자칫 배달시간이 늦어질 가능성이 있다. 최국장은 멈추는 쪽을 택했다.

하나의 뉴스라도 더 집어넣는 것이 언론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윤전기 스톱을 지시하고 개판을 지시했다. 새벽 2시. 이제 하루가 끝났다. 이틀 전에도 전씨가 경찰병원에 갑자기 이송되는 바람에 윤전기를 멈췄다. 일주일에 2~3일은 이런 일이 벌어진다. 최국장은 자리에 누우면서 생각해 봤다. ‘새벽에 신문사의 윤전기를 자주 멈추게 하는 나라가 과연 제대로 된 나라일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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