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5·18 당시 광주항쟁에 대한 보도통제에 항거해 각 언론사에서는 기자협회 분회를 중심으로 제작거부에 들어갔다. 그 가운데 당시 조선일보는 기자협회 분회도 결성돼 있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젊은 기자들을 중심으로 80년 5월 21일 편집국기자 총회를 열고 이튿날 제작거부를 결의했다(당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경우 조선투위와 동아투위 위원들이 기협분회 회원으로 돼 있었다).

제작거부를 주도했다가 강제 해직을 당했던 당시 정치부 기자 이원섭씨(46·현 한겨레신문 논설위원)를 만나 15년전의 그때와 오늘에 대해 얘기를 들어봤다.

-기협분회도 없는 상태에서 제작거부에 들어가기가 어려웠을텐데.

“당시 보안사 준위였던 이상재(현 민자당의원·충남 공주)에 의해 모든 기사가 검열당하는 상황에서 5·18이 터졌다. 우리 기자들은 광주에서 보낸 기사와 사진을 보면서 몹시 격분했지만 광주에 대해 한마디도 진실을 보도할 수 없었다. 75년에 입사한 동기생들인 14기와 후배들인 15, 16기가 주축이 돼 편집국 총회를 열기로 마음먹고 21일 실행에 옮겼다. 당시 편집국장이었던 김용태씨(현 내무장관)가 ‘나하고 먼저 얘기하자’며 만류했지만 이튿날 준비했던 성명서를 낭독하며 제작거부에 들어갔다. 5·18의 진실을 보도할 수 없는 상황에서 제작거부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었다.”

-강제해직에 앞서 일괄 사표 제출 요구를 처음에는 거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7월 28일 부장들이 종이 하나씩을 내밀며 일괄사표를 쓰라고 했다. 사표를 돌려주지 않으면 해직이고 돌려주면 해직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나는 제작거부 문제도 있어 해직이 될 것이 뻔했다. 이들에게 협조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 때문에 사표제출을 거부했다.
결국 나 때문에 동료들과 내 상관이었던 정치부장이 난처한 입장이 됐다는 얘길 듣고 고민 끝에 며칠 후 사표를 내기는 했지만 아직도 강제해직에 대해선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 우리가 해직된 이후 회사에서 해직되지 않은 기자들에게 위로금 형식으로 특별상여금 1백%를 지급했다는 얘길 듣고 참으로 씁쓸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80년 조선일보에서 해직된 기자는 이 위원을 비롯, 이의범기자와 후배기자였던 김형배기자등 모두 3명. 김형배씨는 이 위원과 함께 현재 한겨레신문에서 여론매체부장을 맡고 있으며 이의범기자는 캐나다로 이민갔다.

이 위원과 김부장은 조선일보를 상대로 해고무효소송을 냈으나 재판부는 “강제해직은 인정되지만 신의성실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패소판결을 내렸다. 해직 후 9년이 지난 다음에야 소송을 제기했다는게 신의성실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일반인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엉뚱한 판결’이었다.

-해직기간동안 어려움도 많았을텐데.

“나는 다행히 ‘전자시보’(현 전자신문)에 취직이 됐지만 다른 동료들은 오랫동안 낭인생활을 해야 했다. 번역일로 생계를 이어가는 경우도 있었고 외판원으로 나선 사람도 있었다. 지금까지 회사측은 해직자에 대한 어떤 배상도 하지 않고 있다.”

-현재 언론들은 5·18 문제에 대해 연일 대서특필을 하고 있는데

“대서특필 자체를 뭐랄 수는 없다. 다만 언론은 사과와 반성의 토대 위에서 5·18 문제를 보도해야 한다. 언론이 민주화됐다면 5·18 문제를 지금까지 끌고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니, 12·12나 5·18 같은 비극 자체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언론계도 과거청산을 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은데.

“언론이 당시엔 불가피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자발적으로 협조한 부분도 있었다. 언론은 신군부가 실세라는 것을 재빨리 파악하자 경쟁적으로 여기에 협조하려 했다. 참으로 부끄러운 경쟁이었다. 언론은 최소한의 고민하는 모습도 보여주지 않았다. 신군부의 통치가 종료된 이후에도 참회의 목소리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 다시 아무렇지도 않게 심판자의 모습으로 5·18을 이야기 하고 있다. 누가 뭐라고 하기 전에 언론은 먼저 스스로 반성해야 하며 그때 적극적으로 협조해 현재 출세의 가도에 오른 사람들은 스스로 물러나야 한다. 그래야만 언론이 민주화되고 사회가 민주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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