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광주의 유혈학살이 진행되던 시기에 언론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러나 모든 언론인이 침묵했던 것은 아니었다. 5·18의 진실을 보도할 수 없다면 차라리 제작거부로라도 맞서겠다는 많은 기자들이 있었고, 5·18의 진실을 한치라도 가까이서 목격하기 위해 사선을 뚫고 광주로 향한 기자들도 있었다. 신군부는 이들을 ‘언론인 자율정화’라는 이름으로 언론계에서 추방했다.

당시 조선일보 정치부기자로 재직중 제작거부를 주도하다 해직당한 이원섭씨(현 한겨레신문 논설위원)와 5·18의 진실을 보도하기 위해 단신으로 광주를 향해 달려갔던 당시 TBC 보도국 편제부기자 김준범씨(현 중앙일보 외교안보팀 차장)를 통해 신군부의 언론통제에도 진실보도를 위해 노력했던 많은 언론인들의 ‘숨은 노력’들의 편린을 살펴본다.

특히 김씨는 본지의 요청에 따라 해직 당시의 일기를 공개했다. 본지는 80년 언론상황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이 중 일부를 공개한다.



그때 갓 수습이 떨어질 무렵이던 80년 5월 나는 ‘봐서는 안될’ 광주를 끝내 보고야 말았다. 입사후 잠시 경찰을 돌다 동양방송(TBC) 보도국 편제부에 배치된 나는 당시 광주 취재팀이 전화로 불러주는 기사를 받아적으며 이루 형언할 수 없는 분노에 치를 떨어야 했다. “무장한 공수대원이 지나가는 시민을 방망이로 무차별 구타, 머리가 깨어지고…”

이렇게 열심히 받아적은 생생한 현장기사는 여지없이 휴지통에 처박혀지고 대신 보안사가 각사에 내려보낸 날조기사를 앵무새처럼 읊어댔음은 물론이다.

기자는 과연 어느 선까지 냉철한 이성으로 무장할 수 있는 것인가. 아프리카 검은 대륙이 아닌 바로 이 땅에서, 전시가 아닌 평화시에, 그것도 적군이 아닌 국군에 의해 무차별 살륙전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기자는 그저 바라만 보고 있어야 하는가. 직접 현장을 보지 않고는 도무지 직성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몇달전 12.12 당시에도 한남동 현장으로 가려다 당시 구모 정치부장의 만류로 가지 못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러나 이번만은 상황이 다르지 않는가. 기자가 현장을 보겠다는데 뭐가 잘못이란 말인가.

며칠밤 고민끝에 나는 마침내 5월 24일 오후 광주로 떠났다. 회사에는 주말을 이용, 광주 친척집에 다녀오겠다고 말하고 일단 정읍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카메라와 간단한 세면도구, 내의 몇벌을 가방에 담고 서울을 출발, 당일로 광주에 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으나 버스가 끊어지는 바람에 정읍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이튿날 아침 버스를 타고 장성에 내렸으나 광주진입이 막막했다. 마침 지나가는 트럭을 붙잡아 송정리까지만 가자고 통사정을 했더니 “그 후는 책임질 수 없다”며 마지못해 태워줬다. 차속에서 운전사가 말하는 광주상황을 들었을 때는 겁에 질린 나머지 ‘이제라도 다시 서울로 돌아가버릴까’ 하는 생각이 굴뚝 같았다.

그런저런 생각으로 머리가 깨어질 듯 복잡한 가운데 어느덧 차는 송정리에 다달았다.
역전 광장을 둘러보니 ‘중앙일보·동양방송’이라고 쓰여진 취재차 한대가 서있고 그 주변에는 선배 취재팀들이 하나 둘 눈에 띄었다. 팀장인 오홍근 차장(현 중앙일보 판매이사)을 비롯, 한준엽, 성창기(샌프란시스코 영사) 선배들이 나를 보더니 “혼자 어떻게 여기까지 왔느냐”며 몹시 놀란 표정들이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취재팀은 그 무렵 시외곽으로 잠시 피신해 있던 중 나를 만난 것이었다. 뜻밖의 장소에서 애숭이 후배기자를 만난 선배들은 우선 걱정이 앞선 듯 나에게 “취재는 그만 두고 네 신변안전이나 신경쓰라”고 당부하며 줄곧 나를 경호하듯 데리고 다녔다.

송정리서 광주시내까지는 모든 교통이 두절돼 걸어서 들어갔다. 25일의 광주는 이미 계엄군이 퇴각, 시민군이 장악하고 있었다. 도청앞 금남로같은 간선도로에는 빨간 페인트나 스프레이로 ‘전두환 찢어죽이자’라고 쓴 격문과 함께 칼에 찔려 죽은 시체가 골목 여기저기서 어지럽게 방치돼 있었다. 해가 지자 모든 인적이 끊기면서 마치 죽음의 도시로 변해버렸다. 사직공원 쪽에서는 이따금씩 들려오는 총소리만이 무거운 정적을 가르고 있었다.

당시 시민군 측은 보안사가 써준 기사만을 보도하는 국내언론을 극도로 불신한 나머지 매일 아침 8시 도청앞 광장에서 각 언론사 기자들을 상대로 심사, 어떤 사는 보도완장을 발급해 주고 어떤 사는 아예 완장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세계 주요외신들은 광주참상을 사실대로 보도했기 때문에 시민군측은 이들 기사의 원문과 번역본을 확대, 복사해서 요소요소에 붙여놓았다.

그 무렵 광주는 이미 모든 통신이 두절되는 바람에 전화송고도 불가능했다. 하기야 전화송고가 가능했던들 기사 한 줄 제대로 나간 적이 있었던가.

계엄군의 도청진압 작전이 있고 나서 우린 참담한 심정과 무력감에 빠진 채 서울로 돌아왔다. 그리고 광주에서 보고들은 일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차라리 보지 않았더라면 ‘광주가 어떻더라’고 얘기할 수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숨막히는 시간이 흘러흘러 마침내 7월 30일 언론인 강제해직이라는 또다른 학살무대가 펼쳐졌다.

아침 출근과 함께 ‘사직서’라고 인쇄된 종이 한장씩을 받아들고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말았구나’ 하며 아무 생각없이 각자 자기 이름을 써 냈다. 그것이 이른바 80년의 언론인 강제해직 장면이다. 사표수리자 명단이 발표된 것은 이틀 뒤인 8월 1일이었다.

당시 국방부 대변인을 지냈던 박모 예비역 장군은 후일 내게 이런 얘기를 했다. “당시 군부가 아무리 무소불위의 힘을 가졌다 해도 언론과 검찰만 제 위치를 지켰더라면 그들이 결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전두환씨의 교도소행을 지켜보면서 참 언론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곰곰히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중앙일보 외교안보팀 차장)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