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간지 ‘신춘문예’는 언론사들이 우리 문학의 새로운 재능들을 발굴해 내기 위해 실시해오고 있는 퍽 전통적인 신인 등단제도의 하나이다. 일간지 종수가 많아지고 문예장르가 세분화하면서 신춘문예를 거쳐 등장하는 신인의 수는 해마다 수십명에 달한다.

일간지 신춘문예가 지금까지 우리 문학의 발전, 특히 신인 발굴에 기여한 공로는 적지않다. 그러나 어떤 제도도 시대변화 앞에 안전하지 않다. 제도는 끊임없이 새로운 문제에 직면하고 그 기능과 효율은 점검의 필요성을 강요한다. ‘신춘문예’ 역시 예외가 아니다.

우선 문단 등단 통로로서의 신춘문예 제도는 그 권위와 위상이 예전같지 않다. 한때 신춘문예는 문학지망생들에게 화려한 꿈의 관문이었다. 그러나 ‘문단’이라 불리는 문학공동체가 현실적으로나 개념상 상당한 변화를 겪고 있고 기성문단에 의한 인정이라는 절차 자체의 필요성이나 권위가 상당히 마모됐다는 사실은 신춘문예제도의 위상을 크게 약화시키는 요인이다. 지금은 작가 시인이 될 수 있는 통로가 훨씬 다변화돼 있고 기성문단의 인정이 반드시 그 통로에의 접근을 결정하는 것도 아니다.

신춘문예 제도를 실시하고 있는 일간지 수가 많다는 것도 이 제도의 권위를 마모시키는 요인의 하나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수가 많다는 것 자체가 문제라기 보다는 숫자와 질의 불균형이 문제이다.
이 불균형의 문제는 ‘당선작’ 선정이 문학외적 고려사항에 더 많이 좌우될 수 있다는 사실에 연유한다. 신문사들은 기왕 작품을 모집한 이상 ‘당선작 없음’ 보다는 가급적이면 장르별 ‘당선작을 내야한다’는 명령에 시달리는 것 같아 보인다.

이 명령은 당선작의 수준보다는 신문사의 체면과 권위를 더 많이 고려토록 요구한다. 이 경우 신춘문예의 제도적 효율은 삭감되고 그 취지는 문학 이외의 효용에 더 많이 봉사하는 쪽으로 변질할 수 밖에 없다.

몇몇 대학과 전문대에 설치돼 있는 ‘문예창작과’의 일회성 ‘성과주의’도 차제에 점검할 필요가 있다. 대학·대학원 차원에서 ‘문예창작’이라는 이름의 교육 프로그램을 실시해온 역사가 우리보다 더 오랜 미국의 경우 지금 심각한 ‘문제’로 떠오른 것은 막말로 창작과 출신들끼리의 상부상조와 작품 정형화를 통해 각종 신인상을 ‘해먹는’ 관행의 파급이다.

지금 우리 사정이 그 정도로 심각하다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그러나 문예창작과나 대학 국문학과들이 모종의 경쟁적 성과주의에 흔들릴 경우 신춘문예의 제도적 효율과 취지는 또 다른 방향에서 훼손요인을 만나게 된다.

근년 신춘문예 응모작들의 수준이 현저히 떨어지고 있다는 소리가 계속 들린다. 이게 엉뚱한 소리가 아니라는 것은 ‘수준이하’의 작품들이 당선작으로 버젓이 뽑히고 있다는 사실로 확인된다.

신문사 신춘문예제도가 계속 유지돼야 할 이유가 있다면 그 이유의 덩치는 패기와 능력을 가진 신인의 발굴이지 신춘문예형 시인 작가의 일회적 생산이나 제도를 위한 제도가 아니다.

이미 우리는 ‘한번으로 끝난’ 신춘문예 당선자들을 많이 가지고 있고 그 ‘한번’을 위해 만들어지는 신춘문예형 작품들의 정형화를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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