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공 정권은 광주에서의 ‘학살’을 자기 성립의 토대로 삼은 폭압 정권이었다. 그러나 5공 정권의 대규모 살상은 광주에서 그치지 않았다.

전두환 정권은 출범 직후 국민들의 표현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까지 말살시켰다. 신문 방송의 통폐합과 함께 각종 정기간행물도 강제로 폐간했다. 이 과정에서 당시 대표적인 계간지였던 <문학과 지성> <창작과 비평>도 폐간됐다.

지난 12일 <문학과 지성사>가 창립 20돌을 맞았다.

‘문지’는 문학평론가 김병익, 김주연, 김치수, 고 김현씨 등이 주축이 돼 75년 12월 12일 문을 열었다. 5년전인 70년 같은 이름의 문학계간지 ‘문학과 지성’의 창간에 뒤이은 일이었다.

‘문지’는 <창작과 비평>과 더불어 70, 80년대 문학계를 비롯한 지식인 사회에 가장 강력한 자장(磁場)을 형성했다. ‘문지’와 ‘창비’는 문학잡지와 단행본 출판을 통해 인간의 영혼마저도 계엄치하에 놓였던 그 세월에 ‘우리의 살아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문지에서 발행한 황동규의 ‘나는 바퀴만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로 시작된 ‘문학과 지성 시인선’,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을 비롯한 창작집과 장편소설, 정문길의 ‘소외론 연구’ 등의 학술서적은 그 세월 우리의 살아있음에 대한 증좌였으며 ‘살아내기’를 위한 ‘빵과 물’이었다.

현재 문지는 다양한 창작집과 학술서적, 그리고 80년 강제폐간 당한 문학잡지 ‘문학과 지성’을 87년 재창간해 ‘문학과 사회’를 발행하고 있다.

이런 ‘문지’의 역사를 함께 만들고 지켜온 발행인 김병익씨(57)를 만나봤다.

―사회적 의미에서 봤을 때 ‘문지’의 20년은 무엇이었습니까.

“저도 65년부터 75년까지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로 재직했었지만 70, 80년대 언론은 사회에 대한 비판적 여론을 거의 수용하지 못했지요. 기자들 사이에선 휴지통으로 가는 기사가 진짜 기사라는 자조마저 흘러 나왔으니까요.

70년대엔 언론이 하지 못한 역할을 바로 창비나 문지와 같은 잡지들이 해냈습니다. 그리고 80년대엔 또 출판사들이 단행본이나 무크지를 통해 그 역할을 해냈습니다. 이런 성과들이 모여 민주화의 기폭제가 됐지요. 수난도 많았지만 참으로 영광스런 세월이었습니다.”

―’문지’의 탄생 배경과 과정에 대해서 말씀해주시죠.

“‘문지’의 출발은 70년 창간된 문학계간지 ‘문학과 지성’으로부터 거슬러 올라갑니다. 70년 7월초 저의 3년 후배인 김현씨가 동아일보에 찾아와 계간지를 창간하자고 제의했지요.

당시 저는 기자생활을 하면서 양심적이고 비판적이며 새로운 언론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던 차라 흔쾌히 찬성했습니다.

김현씨의 입장에선 66년 창간된 창비를 본보기로 삼으면서 창비와는 다른, 문학적 자율성을 견지할 새로운 동인지가 필요했던 거지요. 이런 의견이 일치를 보면서 그해 9월에 일조각이라는 출판사를 통해 첫 호를 내게 됐습니다.

첫호가 나오기까지 흥분과 조바심으로 바쁘게 보냈던 그 여름을 잊지 못합니다. 그후 75년 김현씨가 다시 출판사를 설립하자는 제의를 했습니다. 문지를 우리 손으로 발행해야 우리 잡지가 될 수 있다는 명분이었죠.

그리고 그 무렵 저는 한국기자협회장을 맡으면서 동아일보 언론자유선언운동과 관련돼 해임된 상황이었습니다. 우리 동인들이 저와 같이 실업자가 돼 곤핍한 입장에 처할지도 모르므로 이에 대한 대비도 하자는 것이었죠.

이렇게 해서 75년 출판사인 문학과 지성사가 탄생하게 됩니다.

사실 저는 별로 출판을 내켜하지 않았습니다. 늙어서도 현장을 뛰는 노기자가 제 꿈이었는데 해임과 출판사 설립 제의가 맞아 떨어지면서 결국 출판인이 됐지요.”

―80년 폐간됐을 때의 상황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80년 7월말일 겁니다. 창간 10주년 기념호를 준비하고 있는데 누가 전화를 해서 ‘문지’가 폐간됐다고 알려주는 겁니다. 그래서 라디오를 켜보니 ‘문지’가 폐간당했다는 뉴스가 들리더군요. 그리고 이틀후 발행목적 위배로 등록을 취소한다는 공문이 날아왔습니다. 발행목적 위배 사유가 뭔지는 지금도 알 수 없습니다.

후에 안 사실이지만 ‘창비’와 ‘문지’를 폐간하고서 당시 신군부는 ‘이들의 폐간으로 불평불만의 지식인 집단을 근절했다’는 기록을 했다 합니다. 세간에선 ‘문지’와 같은 자유주의적인 색채의 잡지도 폐간시킨 데 대해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결국 창간 10주년 기념호는 교정쇄 상태로 50부를 복사해 동인들과 문인들 사이에서만 돌려봤습니다.”

―‘창비’와 달리 ‘문지’가 구축해 온 문학의 축은 무엇이었습니까.

“‘창비’가 이념적으론 현실 참여와 평등을, 문학적으론 리얼리즘을 표방했다면 ‘문지’는 이념적으론 자유를, 문학적으론 모더니즘을 추구했습니다.

한 사회에 대해 비판적 안목을 견지한다는 데는 일치했지만 ‘창비’가 사회과학적 접근을 주요한 방법으로 봤다면 ‘문지’는 인문과학적 접근을 주요하게 봤습니다. 이런 ‘창비’와 ‘문지’의 일견 상반돼 보이는 태도는 우리 문학계를 비롯한 지식인 사회의 정신을 형성하는 데 보완과 길항의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다매체다채널 시대에 출판과 문학은 어떻게 자리매김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고민스런 문제입니다. 출판이 문화의 변두리로 밀려날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전자 출판이나 그 외의 멀티미디어가 그 자리를 메우겠지요.

그러나 책의 효용이 아주 없어진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정보나 이미지화가 가능한 내용들은 새로운 매체로 넘어가겠지만 문학이나 학술등 교양적, 정서적 내용들은 여전히 출판으로 남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오히려 출판의 독자성이 강화되는 형태가 되겠지요.

작가도 인류 영혼의 스승에서 영화의 원작자와 같은 위치로 바뀔 것입니다. 이런 변화를 인정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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