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조사단이 천안함 민군 합동조사단의 조사 결과를 믿지 못하겠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미국과 중국 등에 보낸 사실이 확인되면서 천안함 사건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게 됐다. 27일 한겨레가 공개한 러시아 조사단 보고서에 따르면 러시아 조사단은 천안함이 북한의 어뢰 공격으로 침몰했다는 합조단의 주장을 정면으로 뒤집었다. 러시아 조사단은 천안함이 좌초 후 기뢰 폭발로 침몰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우리 정부는 당초 기대에는 크게 못 미쳤지만 국제연합(UN) 안전보장이사회 의장 성명을 끌어낸 것을 소기의 성과로 평가해 왔다. 굳건해진 한미동맹을 과시하면서 대대적인 한미 연합 군사훈련을 펼치고 이를 계기로 대북 압박을 강화해 나갈 계획이었다. 그러나 러시아 보고서가 공개되고 합조단 조사 결과에 의문을 제기하는 외신 보도가 쏟아지면서 정부의 운신의 폭이 좁아지게 됐다. 대북 강경 기조에도 변화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 러시아 조사단은 “천안함은 침몰 전에 오른쪽 해저부에 접촉하고 그물이 오른쪽 프로펠러와 축의 오른쪽 라인과 엉키면서 프로펠러 날개가 손상됐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보고서에서 밝혔다. 사진은 천안함 오른쪽 프로펠러 축에감긴 그물. 이치열 기자 truth710@  
 
무엇보다도 천안함 사건의 전면 재조사를 요구하는 국내외 여론을 마냥 무시하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 지금까지 합조단이 제시한 증거 자료들 대부분이 뒤집혔거나 과학적 논란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합조단은 계속해서 말을 바꾸거나 군색한 변명으로 일관해 왔다. 엉뚱한 도면을 잘못 제시한 사실이 드러나 망신을 산 적도 있다. 러시아 조사단은 심지어 합조단이 제시한 일부 증거에 대해서는 조작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우선 합조단은 오그라든 프로펠러를 설명해야 한다. 합조단은 지난달 20일 전국언론노동조합 등 언론단체 설명회에서 “프로펠러가 급정거 할 경우 관성력에 의해 회전 방향으로 날개 끝 부분이 오그라들 수 있다”고 설명했지만 “사실 우리도 잘 이해는 안 된다”고 털어놓은 바 있다. 합조단 관계자는 “비용 문제도 있고 이미 확실한 증거 자료가 확보돼 있기 때문에 시뮬레이션을 의뢰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합조단이 확실한 증거라고 제시한 어뢰 추진체는 이미 증거능력을 상실한 상태라는 지적이 많다. 러시아 조사단도 “합조단이 제시한 어뢰 추진체는 육안 감식 결과 6개월 이상 물 속에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사고와는 무관한 조작된 증거일 가능성을 시사한 셈인데 이로써 합조단은 신뢰에 엄청난 손상을 입게 됐다. 

러시아 조사단은 이밖에도 CCTV 동영상이 끊긴 시각과 승조원이 구조 요청을 한 시각 등이 합조단이 제시한 사고 시각과 다르다는 사실의 의문을 제기했다. 이 같은 의문은 그동안 국내에서도 여러 차례 제기된 바 있으나 합조단은 KNTDS(해상전술지휘시스템) 항적 자료나 교신 내역 등을 공개하지 않아 의혹을 키워왔다. 물기둥과 섬광을 둘러싼 논란도 속 시원한 해명이 없었고 매번 뒤집혔다.

전체적으로 조사가 부실했다는 지적도 계속되고 있다. 합조단 조사위원 가운데 지진파 전문가가 단 한 명도 없었고, 어뢰 추진체의 부식 상태 역시 육안 감식 외에 제대로 된 분석 결과를 내놓지 못했다. 1번이라고 적힌 파란색 매직 글씨에 대해서도 ‘솔벤트 블루 5’라는 성분이 포함돼 있다고만 밝혔을 뿐 글씨가 적힌 시점이나 변질 상태 등에 대해 아무런 설명이 없었다. 국민들이 천안함 조사에 의혹을 풀지 못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참여연대 협동사무처 이태호 처장은 “러시아 조사단이 합조단이 제시한 증거를 전면 부정하고 좌초 후 기뢰 폭발 또는 한국 어뢰에 의한 침몰 가능성까지 거론하면서 합조단 조사는 신뢰를 잃게 됐다”면서 “전면 재조사가 불가피하게 됐다”고 지적했다. 언론단체 검증위 노종면 책임위원은 “합조단은 조사주체가 아니라 조사대상이 돼야 하며 국정조사를 통해 합조단의 조사과정과 결과 전반에 걸쳐 진상규명이 이뤄져야 하다”고 주장했다.

합조단 조사위원으로 참여했던 신상철 서프라이즈 대표는 “한나라당이 국회에서 과반수를 장악하고 있는 이상 국정조사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을 것이고 국민적 합의를 전제로 정부 차원에서 재조사를 결단하는 것이 합리적인 수순”이라고 지적했다. 신 대표는 “지금까지 1번 어뢰의 진위 여부가 핵심 쟁점이었다면 이제부터는 천안함의 이동 경로를 비롯해 사고 당시 상황을 원점에서부터 재구성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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