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오늘>이 단독 입수한 동양방송(TBC) 보도지침은 75년 5월16일부터 79년 10.26직후인 11월 20일까지 무려 4년 6개월 여라는 긴 기간에 걸쳐 중앙정보부 등에서 각 언론사에 하달한 보도지침을 기록해 놓은 것이다.

유신치하에서 조직적으로 이뤄진 언론통제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이 보도지침 전문을 나누어 싣는다. 그 첫회로 75년 5월16일부터 같은 해 7월 6일까지의 보도지침 내용을 공개한다. 원문을 수정없이 전재했으며 뜻이 애매모호한 것들을 분명히 하기 위해 주(*표시)를 달았다.

보도지침 내용중 < >안의 내용은 보도지침 시달처및 시달자를 말하는 것으로 여기의 남산, CIA, A, C 등은 당시 언론통제의 주무부서였던 중앙정보부를 지칭한다. 또 박광서, 곽계장 등은 중앙정보부 동양방송 담당자들이다.


75년 5월 16일자로 시작되는 동양방송 보도지침에서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월남전의 종결과 함께 월남내 한국인 동정에 대한 기사들이다. 75년 4월 30일 이른바 ‘주판과 컴퓨터의 전쟁’으로 불리는 월남전은 미국의 패배로 막을 내렸다.

박정희정권은 64년부터 10여년에 걸쳐 연인원 31만에 달하는 군인과 민간인을 사실상 ‘미국의 용병’격으로 월남에 파견하였다. 박정권은 패망한 월남에 남게 된 동포의 안전귀환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호도하기 위해 이들의 동정에 대한 일체의 보도를 통제하였다. 대신 관제안보궐기대회를 전국적으로 개최하면서 안보 분위기를 고조시킨 후, 5월 13일 악명높은 ‘긴급조치 9호’를 선포하였던 것이다.

월남전의 패망만이 아니라 남북관계에서 볼 때 75년은 여러 가지로 박정권에게 매우 불리한 시기였고 따라서 이 분야에 대한 언론통제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조선(북한)은 73년에 발표된 조국통일 5대방침에 따라 단일국호에 의한 유엔가입, 남북연방의 실시 등을 제의해놓고 있는 상태였다.

이에 박정권은 조선의 평화외교의 확대에 대응하기 위하여 비동맹회의의 가입을 추진하게 된다(6.28, 7.22, 8.11 등). 그러나 가봉대통령의 방한초청, 수하르토에 대한 사전 공작 등에도 불구하고 비동맹회의는 조선의 가입은 승인하고 남한의 가입은 부결시켰다.

또한 조선에 대해 유엔에 가입하면 승인할 용의가 있다는(7.20자) 일본의 측면 지원에도 불구하고 유엔 제30차 총회에서는 남의 유엔 단독가입안을 부결시키고 조선의 제안(유엔사 해체, 유엔군 철거 등)을 51대 38로 가결시켰다.

박정권은 국제적인 평화분위기의 진전이 정권의 위기를 초래하리라 예상하고 국내적으로는 국민의 손과 입을 묶는 긴조 9호체제를 더욱 강화하였다. 그러나 유신에 대한 국민적 저항은 나날이 확대되어갔다.

4월 11일 서울농대생 김상진군이 할복자결로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의 불길을 지피면서 대학가의 반유신 학생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였다(보도지침 5.22, 5.30 등).
학생운동과 함께 유신에 대한 국민적 반발을 확산시킨 사건은 동아일보의 광고탄압사태였다.

74년 10월 동아일보 기자들의 ‘자유언론 실천선언’으로 재개된 언론자유화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박정권은 비열한 광고탄압과 대량해고를 감행하였다(7.3일자 보도지침). 그때 해고, 투옥된 이부영기자는 법정진술을 통해 ‘이 시대의 범법자는 판사, 교수, 기자’라고 유신에 굴종하는 지식인층을 통렬히 비판하였다(12.29).

74년의 인혁당사건이 조작이라는 요지의 ‘고행1974’라는 글을 동아일보에 기재한 이유로 김지하시인이 출감 한달만에 재수감되고 그 변호를 맡았던 한승헌변호사조차 반공법 위반으로 중앙정보부에 연행 구속된 것(5.20, 6.26, 9.5, 9.10, 9.12 등)과 재야의 대통령으로 불리던 장준하씨가 8월 17일 의문의 죽음을 당한 것은 긴조 9호 시대가 개막된 75년 한국사회의 상징적 단면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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