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은 타락하기 쉽다. 변덕도 많다. 권력에게 선이 되어 줄 것을 요구하는 것은 어리석다. 선하게 행동하지 않으면 안되게끔 견제를 하고 압력을 행사하는 게 필요하다. 불완전하지만 민주주의는 그런 필요를 제도화한 장치다.

민주주의는 3권분립을 토대로 삼고 있지만 너무도 당연해 법으로 자세히 명문화하지 않은 원칙들을 갖고 있다. 언론과 지식인의 역할도 그런 경우에 속한다. 언론과 지식인은 여론을 이끌거나 대표한다. 여론은 그들을 매개로 해서 권력을 견제한다. 따라서 언론과 지식인의 생명은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이다.

그러나 우리의 언론은 권력으로부터 독립돼 있지 않다. 우리는 그런 현실을 가리켜 권언유착이라 한다. 많은 사람들이 권언유착에 대해선 알지만 권학유착에 대해선 깊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러나 권학유착도 언원유착 못지않게 심각한 문제다.

지식인의 정치참여는 권장할만한 일이다. 대선때 특정후보의 자문교수단에 참여하는 것도 좋은 일이다. 교수출신으로 장관이나 청와대 비서실에 들어가는 것도 좋은 일이다. 이 점을 분명히 해놓고 이야기해보자.

최근 12·20개각은 또 한번 이 땅에 독버섯처럼 뿌리내린 권학유착의 실상을 확인케했다. 연세대 안병영교수와 서울대 이각범교수가 각각 교육부장관과 청와대 정책기획 수석에 임명됐다. 둘 다 개혁지향적인 인물이라니 박수를 보내야 마땅하겠건만, 그럴 수 없는게 안타깝다.

왜 그런가? 두 사람 다 평소 왕성한 ‘언론활동’으로 여론에 적잖은 영향을 미쳐왔기 때문이다. 그건 곤란하다. 한가지 제안을 하고 싶다. 앞으로 장관이나 청와대 수석을 원하거나 맡기면 수락할 교수들은 절대 신문과 방송을 이용해 정치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말아달라. 그런 언론활동을 열심히 한 교수가 정치를 하고 싶다면 유권자들의 심판을 거치는 국회쪽을 택하는 것이 옳다.

왜 그런가? 지금 우리 사회는 ‘신뢰의 위기’를 겪고 있다. 노태우씨나 전두환씨만이 그런 위기를 낳은 주범이 아니다. 3김씨에게도 책임이 있고, 언론에게도 책임이 있다. 그런 판에 정치평론을 하던 교수들까지 끼어들어 ‘심판’의 역할을 포기하고 정치의 주체로 나서겠다면, 그간의 ‘심판’역할이 나름대로 공정했다고 자부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특히 안병영씨는 김대중씨의 정계복귀에 대해 ‘신뢰의 위기’를 빙자하여 온갖 독설을 늘어놓았던 인물이다. 그건 좋다. 그런데 같이 경실련에 몸담았다가 정치판에 뛰어든 서경석씨에게 이 나라 정치판을 바꿔 달라고 호소하는 등 기존 정치판을 뒤엎자는 식의 글을 언론매체에 써 온 안병영씨의 입각은 ‘신뢰의 위기’와 무관한 것인가?

안병영씨의 주장은 존중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그가 연세대교수 겸 정치평론가로 활약할 때에만 가능하다.
주로 정치평론을 해온 그가 언제부터 이 나라의 교육정책에 관심이 있었다고 덜컥 교육부장관 하라고 하니까 그 떡을 넙죽 받아먹는단 말인가.

양심적인 대학교수들은 정치평론을 하기가 겁난다. 독자들이 어떻게 보겠는가? “뭐 한자리 할려고 꽤 애쓰는군!” 그래서 우리 사회에 ‘심판’이 설 자리는 점점 위축된다.

안병영장관에게 축하는 해주지 못하고 비판만해서 미안한 생각이 든다. 그러나 권학유착의 문제제기 만큼은 분명히 하고 싶다. 앞으로 모든 언론사는 교수에게 정치칼럼을 청탁할 때엔 “나는 대통령이 장관이나 청와대 수석 자리를 아무리 강권해도 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반드시 받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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