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를 통해 노태우 씨 공판 모습을 지켜보는 교사와 학생들. 칠판엔 ‘역사’라는 두 글자가 큼지막하게 써 있지만 교사는 하릴없이 TV만 쳐다볼 뿐 아무 말이 없다(12월 19일자 한겨레 그림판). 수시로 바뀌는 역사 평가 내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침묵으로만 일관할 뿐, 이것이 역사의 정방향이라고 선뜻 말할 수 없는 모습 속에서 굴절된 현대사의 한 단면을 본다.

그 침묵의 여백에 청와대는 이렇게 써 넣었다. ‘역사 바로세우기’. 해방 50주년의 마지막 한 달을 청와대는 ‘역사 바로세우기’라 명명했고, 5·18 특별법 제정, 전·노씨 기소, 노씨 1차 공판 등 대형 사안을 그 일환으로 잇따라 내놓았다. 그리고 ‘역사 바로세우기’의 전열을 정비한다는 취지로 개각을 단행하면서 또 하나를 써 넣었다. ‘개혁.’

하지만 ‘개혁의 시대’를 사는 국민은 혼란스럽다. 청산은 있을지언정 건설의 조감도는 찾아볼 길 없다. ‘역사 바로세우기’가 대선자금 공개의 예봉을 피하고 총선 표밭 다지기용으로 급조됐다는 느낌이 우세할 뿐이다.

청산작업마저도 ‘날림’의 기미가 짙게 배어나온다. 5·18 특별법엔 특별검사제가 빠져버렸고, PK·TK의 대약진과 YS맨의 전진 배치로 특징지어지는 새 내각은 ‘개혁 내각’이라기 보다는 총선 관리 내각이란 느낌이 더욱 짙다. 법정에서 자신의 정당성을 강변하는 재벌 총수들의 양복 차림을 보면서 정경유착의 뿌리가 아직도 건재함을 느낄 뿐이다.

그래서 국민의 시선은 김대통령의 역사관으로 모아진다. 쿠데타적 사건을 군사반란으로, 역사의 판단에 맡기자던 사건을 역사 바로세우기 대상 제1호로 순식간에 바꿔버린 ‘고무줄 역사관’이 청산 작업을 날림으로 몰아가고 있지 않나 하는 의구심을 곁들인 채.

국민의 궁금증을 아는지 모르는지 김대통령은 말이 없다. ‘제2의 건국’을 하는 심정으로 역사 바로세우기를 펼쳐 나간다는 말 뿐. 역사 바로세우기의 바로미터라 할 수 있는 대선자금 공개에 대해서도 함구로 일관하고 있다.

그래서 국민은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사각의 여백을 창문 삼아 만화에 드리워진 ‘감’을 엿보려 애쓴다.
하지만 갈증은 여전하다. 대선자금 공개를 요구하는 민심을 부각시키거나(중앙 22일자 만평), 노씨와 김대통령의 밀고당기기를 묘사한(한겨레 20일자) 만평 등이 없지 않았으나, 대부분은 이젠 ‘조져도’ 힘 못 쓰는 전·노씨의 면면만을 주된 ‘거리’로 삼았을 뿐이다.

전씨의 단식과 노씨의 굴신을 대비시킨 다거나(경향 21·22일자 만평), 전씨와 노씨의 처지를 냉소하는 만화(동아 18·19일자, 경향 22일자 등)들이 대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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