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려오는 역사란 누구도 가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이다. 그 역사의 한마디인 새해 또한 동일하다. 무엇이 담겨 있는지 알 수 없는 ‘역사의 두루마리’가 해와 달이 바꿜 때마다 인간의 역사(役事)를 기다린다.

그렇다. 역사란 하늘의 조건에 따라 가름되는 기상과는 다르다. 인간과 사회의 조건이 역사의 기상을 결정한다. 때문에 하늘의 기상예보와 역사의 기상예보가 다를 수 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다.
이땅의 지난 날은, 정치가 정치답지 못하고 사법이 사법답지 못하고 언론이 언론답지 못했던 참담한 부끄러움으로 얼룩진다. 인간과 사회의 구실 저마다가 도무지 저답지 못했다고 말해도 지나치지는 않을 터이다.

그 동기가 정략이든 위선이든, 이제야 겨우 이땅의 겉모습은 그 부끄러움을 넘어서고자 하는 기지개가 한창이다. 말하자면 그것이 새해를 맞이하는 인간과 사회의 조건이다. 그렇다면 새해의 역사는 그 겉모습의 내면화와 더불어, 종잡을 수 없는 인간과 사회를 제동하는 새로운 틀의 추구가 필요하다는 깨우침에 이르게 된다.

이를테면 ‘비자금’의 소용돌이 속에서 거론되다가 사라져버린 재벌의 소유분산과 경영의 전문화도 그 하나의 보기가 될만하다. 구태여 ‘재벌해체’를 말하지 않더라도 반드시 열매를 거두었어야 할 그 논의가 왜 실종되어버렸는지 안타깝기 짝이 없다.

나는 1980년대 한동안 일본의 어느 대학에 몸을 의탁한 적이 있다. 그때 명색 일본의 지식인이라는 이들은 곧잘 이런 물음을 던져왔다.
“당신네 나라엔 세습의 문화가 있는 것 아닌가?”

그 무렵 고개를 들었던 김정일의 세습을 두고서의 물음이었다. 북녁에선 사회주의의 정권이 세습되지만, 남녘에선 자본주의의 재벌이 세습되지 않는가. 비단 그뿐인가. 언론사의 사주들도 당당히 세습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비 한마디 일어나지 않는다.

그들의 말대로 ‘그런 나라는 세상에 없다.’
그날, ‘문화’까지를 들먹이는 그들에게 항변했던 구차스러운 논리와 스스로 메아리가 되어 돌아오는 수치의 심정을 이 마당에 늘어놓을 겨를은 없다. 이제는 우리의 부끄러움을 스스로 씻어나가야 할 때이다.

언론의 경우만을 한정해서 말하더라도 그러하다. 소유의 독점과 세습이 당연하다는 듯이 이어지는 조건속에서, 언론종사자들의 ‘정신’만을 강조하는 것은 여전히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충분하지는 않다.

한마디로 왕국을 방불케하는 전횡을 사회적으로 막아낼 수 있는 틀이 필요하다. 헌법을 비롯한 법제에서부터 정책과 사회적 역량의 동원에 이르기까지, 추악한 군상으로 떨어져버린 언론을 ‘구제’하는 새로운 틀이 마련되어야 한다.

나는 그것이 새해의 역사가 인간의 역사를 기다리는 과제임을 믿는다. 인간은 왜 마디가 없는 세월에 마디를 새기고 달력을 만들어냈던가. 그 마디속에서 새로운 역사를 다짐하고자 함이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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