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들어 북한 식량문제를 놓고 벌어지는 지구촌의 모습에서 한반도 정세변화의 실상이 확연히 드러난다. 냉전구도가 깨진 국제상황은 남북한이 동북아를 벗어나 전세계를 무대로 한 무한경쟁시대에 진입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북한과 미국, 일본의 관계가 과거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단계로 진입함에 따라 남한은 대북문제를 놓고 혈맹관계로 지칭되던 미국과도 갈등관계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미국과 일본이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통한 정치·경제적 이해득실을 계산하는 과정에서 남한의 불이익을 강요하는 경우도 빈발할지 모른다.

미국은 남한에 고가의 군사장비를 판매하고 통상이익을 보전하는 기본적인 남한 정책을 유지하면서도 북한을 통한 자국이익을 증진시킬 수 있는 단계까지 남한 당국자를 혼란스럽게 만들 수 있다. 특히 미국은 한반도 안보라는 논리를 앞세운 대북 평화공세를 ‘남한은 비용만 부담하고 생색은 미국이 내는 식’으로 밀어붙일 공산이 크다.

북한의 대외정책이 남한을 가급적 배제하면서 미국, 일본 등과의 관계개선을 꾀하는 노선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라면, 남한의 기존 대북정책은 지구촌 전체를 무대로 삼아 북한과 무한 경쟁을 벌이는 것이 될 수도 있다.

김대통령이 새해 국정연설에서 밝힌 바와 같이 ‘북한이 먼저 태도 변화를 보여야 한다’는 식의 대북정책은 앞으로 좀더 많은 시련을 겪어야 할지 모른다. 남한의 대북정책이 긍정적인 결실을 얻으려면 복잡한 동북아 정세와 국제 여론의 변화 추이 등을 감안한 무게와 영향력을 갖춰야 할 것이다. 국내 유권자나 보수층만을 고려한 대북정책의 실효성은 극히 제한적일 것이기 때문이다.

동북아 정세변화속에서 남한은 직·간접적으로 북한으로부터 국내 정치에 큰 영향을 받게 되는 반면 북한은 그 체제적 특성상 남한으로부터의 정치적 영향을 크게 받지는 않을 것이다. 지난해 지자제 선거에 북한 쌀 제공이라는 변수가 미친 영향은 적지 않았던 것으로 나타났고 남한 정부는 향후 북한 식량제공문제가 오는 4월 총선에 여당후보에게 불리한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다. 북한과 미·일과의 관계 여하에 따라서는 북한이 남한 정치상황에 미칠 영향력이 대단할 것이며 이런 현상은 과거에 경험했던 것과는 크게 다를 것이다.

특히 북한이 미국의 언론 등을 이용하는 입체적인 방식으로 남한 정치상황을 교란하려 할 경우 그 파급효과가 클 가능성이 매우 높다. 만약 남한 정부가 주체적 대북정책수립에 실패한다면 북한의 남한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 행사는 매우 집요할지 모른다.

이상과 같은 점을 감안할 때 남한이 앞으로 취할 대북전략은 그 윤곽이 뚜렷해진다. 즉 국민들에게 변화된 지구촌과 동북아 정세를 납득시켜야 하고 국가보안법 등 냉전체제의 구질서를 온존시키는 제도의 효율성을 재고해야 한다. 그리고 단기적인 대증처방식 대북정책에서 탈피해 중장기적 안목으로 지구촌을 무대로 의식하는 원숙한 대북정책과 통일정책을 세워나가야 할 것이다. 정전체제는 동북아 해빙기가 깊어갈수록 그 존립근거가 약해질 운명이라면 평화협정체제로의 전환을 검토하고 한국군의 전시 작전지휘권 문제도 전향적 자세로 검토해야 한다.

특히 단임제로 끝나는 대통령제를 감안할 때 청와대는 사안별로 국내 여론의 눈치를 살피는 평면적 대북정책에서 벗어나 진정한 민족적 이익을 최대한 키우고 가장 생산적인 통일을 지향하는 입체적 통일정책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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