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이 나란히 앉아 담소를 나눈 것은 2008년 2월25일 대통령 취임식이 마지막이었다. 이 대통령이 지난 4월23일 전직 대통령을 청와대로 초청했을 때 참석한 사람은 김영삼 전 대통령, 전두환 전 대통령 두 사람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은 지난해 모두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편집자

이명박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 악연’은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통령 자리까지 올랐던 두 정치인은  1996년 4월11일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 종로구에 출마해 직접 격돌한 적도 있다.

이 대통령은 신한국당 후보로, 노 전 대통령은 민주당 후보로 나섰다. 당시 민주당 주류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새정치국민회의’ 창당으로 집단 탈당했지만, 노 전 대통령은 당에 남았다. 신한국당-새정치국민회의 대결구도로 재편됐던 당시 정치구도에서 민주당 당세는 미약했다. 당시 선거에서 이명박 신한국당 후보는 4만230표, 노 전 대통령은 1만7330표를 얻었다. 2등은 새정치국민회의 이종찬 후보 차지였다.

노 전 대통령은 당시를 회상하며 “결과는 참담했다. 2등도 아니고 3등으로 떨어졌다. 이명박 후보가 승리했다. 내가 대통령이 되는 것도, 그가 그 다음 대통령이 되는 것도 당시에는 상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 지난 2008년 2월25일 대통령 취임식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노무현 전 대통령을 배웅하고 있다. ⓒ연합뉴스  
 
96년 종로 맞대결 … MB 선거법 위반

이명박 후보 당선은 ‘깨끗한 승리’가 아니었다. 이명박 후보 비서관을 지냈던 김유찬씨가 선거법 위반을 폭로했고, 증인 해외도피 논란까지 벌인 끝에 당시 이명박 의원은 국회의원직에서 물러났다. 이 대통령은 2002년 서울시장 선거에서 승리하면서 화려하게 복귀했다. 노 전 대통령이 2002년 대선에서 승리하면서 두 사람은 현직 대통령과 서울시장으로 ‘불편한 동거’를 시작했다.
2007년 대선을 앞두고 보수신문의 ‘뉴라이트’ 바람몰이가 이어졌다. 이명박 대통령은 한나라당 경선에서 박근혜 전 대표를 꺾고 승리했고, 기세를 몰아 대선까지 압승을 거뒀다. 당시 시중에서 ‘노무현 탓 놀이’가 유행할 정도로 인기가 없던 노무현 대통령과 떠오르는 권력으로 부상한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는 처지가 전혀 달랐다.

노 전 대통령은 이 대통령이 당선자 시절인 2007년 12월28일 청와대를 방문한 일화를 자서전에 소개했다. “전직 대통령을 예우하는 문화 하나만큼은 전통을 확실히 세우겠습니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가 당시 현직 대통령에게 전한 말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내가 부탁하지도 기대하지도 않은 말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자존심이 상하기는 했지만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감사 표시를 했다”면서 “하지만 그것은 믿을 만한 약속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 취임 이후 벌어진 사건 때문이다. “봉하 들판에 오리를 푼 지 얼마 지나지 않았던 2008년 6월12일 마침내 나를 겨냥한 공격을 시작했다. 청와대는 내가 사저로 가져온 대통령기록물을 모두 반환하라고 요청했다.”

노 전 대통령은 자서전에서 6월14일 이명박 대통령에게 전화를 했을 때 “불편이 없는 방법을 찾도록 챙겨 보겠다”고 말했지만, 아무 연락이 없었다고 전했다. 노 전 대통령은 7월16일 이 대통령에게 편지를 썼다.

노 전 대통령은 국가기록물 불법유출 논란과 관련해 선처를 호소하며 “나에게 책임을 묻되, 힘없는 실무자들을 희생양으로 삼는 일이 없도록 해주시기 바란다”면서 “(청와대 ‘핵심관계자’ 주장 등은)공작에는 밝으나 정치를 모르는 참모들이 쓴 정치소설은 전혀 근거 없는 공작소설”이라고 말했다. 국가기록물을 둘러싼 전·현직 대통령의 충돌은 이렇게 정리했다. 노 전 대통령은 “저는 두려운 마음으로 이 싸움에서 물러선다”고 말했다.

“공작에 밝으나 정치 모르는 참모의 ‘정치소설’”

당시 청와대 이동관 대변인은 “비록 늦었지만 노 전 대통령 측이 위법상태를 인정하고 반납의 뜻을 밝힌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면서 “이 사안은 정치적 문제가 아니라 법과 원칙에 관한 문제”라고 주장했다. 이 대변인은 “대통령도 법 아래에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명박 대통령도 당선인 시절 BBK 사건과 관련해 검찰의 조사에 응했던 것 아닌가, 이상이다”라고 말했다.

국가기록물 논란은 이명박-노무현 두 사람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드러낸 사건이다. 이후 노 전 대통령과 가까운 이들에 대한 세무 조사가 이어졌다. 노 전 대통령은 당시 상황과 관련해 “나하고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많은 기업들이 모두 세무조사를 받았다. 심지어 내가 자주 가던 식당도 세무조사를 당했다”면서 “국세청 세무조사는 여러 건의 고발과 검찰 수사로 이어졌다. 그때마다 모든 언론들이 ‘노 전 대통령 측근’ ‘참여정부 고위인사’ 연루 가능성을 보도했다”고 설명했다.

노 전 대통령 주변부를 향한 압박은 점점 ‘본질’을 향해 조임의 강도를 높여갔다. 2009년 4월 강금원 전 창신섬유 회장, 정상문 전 청와대 비서관 등이 연이어 구속되자 노 전 대통령은 이런 내용의 청원서를 이 대통령에게 전했다. “저는 이미 모든 것을 상실했습니다. 권위도 신뢰도 더 이상 지켜야 할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저는 사실대로, 그리고 법리대로만 하자는 것입니다.…이제 저는 한 사람의 보통 인간으로 이 청원을 드립니다.”

“언론 난도질, 당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는 언론이 노 전 대통령을 둘러싼 각종 의혹 보도를 홍수처럼 쏟아내던 시기였다. 노 전 대통령은 난도질을 당하는 느낌을 받았지만, 당하는 것말고는 아무 것도 할 것이 없었다고 심경을 밝혔다. 지난해 4월 말부터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 이해찬 전 국무총리, 한명숙 전 국무총리가 차례로 봉하마을을 찾아 노 전 대통령을 위로했다.

노 전 대통령은 “(위로를 하러 온 이들이) 검찰이 기소를 하면 그것으로 일단락 될 것이고, 시간이 좀 지나고 나면 다시 농사일을 하러 나가도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런 날이 올 것 같지 않아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런 날이 올 것 같지 않았다’는 말은 현실이 돼 버렸다. 노 전 대통령은 4월30일 검찰에 출두한 지 23일 만인 2009년 5월23일 봉하마을 부엉이 바위에서 목숨을 던졌다. 유서로 남긴 마지막 말은 이것이었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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