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노이아’(Metanoia)라는 낱말이 가슴을 쥐어뜯는 작금이다. 기독교의 상징으로도 회자되는 ‘메타노이아’는 회개의 뜻이기도 하다. ‘메타’는 물론 ‘사후’를 지시한다. 구태여 풀어 말하자면 ‘뒤에’ 또는 ‘뒤늦게나마’의 뜻이다. ‘노이아’는 ‘노에오’(noeo)의 변형으로 ‘안다’ 또는 ‘깨닫는다’는 말이다. 그 합성어가 ‘메타노이아’인 셈이다.

뒤늦게라도 알고 깨달아야

설령 그때는 알지못했다고 할지라도 인간은 뒤늦게나마라도 알아야 하고 깨달아야 한다. 인간이 짐승을 깔볼만한 자격이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그것이 짐승과 다르다는 인간의 자부이다. 기독교의 복음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나니”라고 말한다. 구원의 전제가 회개라는 뜻이리라.

기독교의 신도가 되지도 못한 주제에 ‘메타노이아’라는 낱말이 가슴을 쥐어 뜯는 까닭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과거청산’ ‘역사 바로 세우기’ 따위의 나팔소리가 요란한 가운데서도 정작 그 바탕이 되어야 할 ‘메타노이아’의 문화는 처절하리 만큼 가난한 탓이다. 종교적 구원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그 나팔소리들은 필경 회개의 깊은 가슴속에서 울려나야만 정당성을 자랑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 바로 세우기’를 열창하는 오늘의 대통령부터가 ‘메타노이아’의 깊은 가슴으로 나팔을 울려내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대선자금 또는 정치자금을 해명하는 신년담화의 대목에서도 그는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넘어가버리고 만다. 너무 가혹할지는 모르나 뼈저린 ‘메타노이아’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다 그렇게 했다”는 투로 넘어간다면, 쇠고랑을 찬 전직 대통령들도 면죄부를 요구할만한 근거를 갖게 될 터이다.

‘공소권 없음’을 고집하다가 하루 아침에 돌아선 검찰을 들먹이는 것은 거의 자학에 가까운 일이다. 시인과 작가와 지식인들의 두꺼운 얼굴에서도 ‘메타노이아’의 그림자 한가닥마저 보이지 않음에랴. 그러나 오늘은 남들의 무지와 무치(無恥)만을 들먹여도 좋을 때는 아닌 것 같다. 이땅의 언론을 보라. ‘메타노이아’의 그림자를 확인할 수 있는가. 기껏 몇마디 겉치레의 인사로 지난 날을 회개하는듯한 장면이 고작이었을 뿐이다.

회개하지 않는 언론

‘메타노이아’는 지난 날의 잘못을 회개하는 각성이면서, 동시에 지난 날의 잘못을 되풀이할 수 없다는 결단이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열창되는 ‘역사 바로 세우기’의 참뜻이 되어야 마땅하다. 그 큰 줄기에 견준다면 12·12와 5·18의 단죄는 당연히 거쳐야 할 하나의 수순에 불과하다. 때문에 어제의 일에서 출발하는 ‘역사 바로 세우기’는 오늘의 일이며 더욱 내일의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땅의 언론은 아직도 ‘메타노이아’의 결단과 제의를 생각하지도 않는다. 고민하지도 않는다. 쥐어뜯는 가슴의 아픔을 이겨내기 어려운 나는 그러므로 어쩔수 없이 현업의 여러분에게 제언하고자 한다. 언론의 ‘메타노이아’를 확인하는 ‘대결단’과 ‘대제의’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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