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하게 1년 전이다. 2009년 4월30일 경남 김해 봉하마을에는 방송사 생중계 차량이 몰렸다. 헬기도 떠올랐다. 방송사는 봉하마을에서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까지 '어떤 차량'을 뒤쫓았다. TV를 켜면 화면에는 많은 사연을 담은 그 '추격전' 장면이 나왔다.

누군가는 울음을 터뜨렸다. 억울함의 눈물이었다. 현실에 대한 절망이었다. 누군가는 웃음을 지었다. 냉소의 웃음이었다. 힘의 우위에 대한 만족이었다. 제16대 대한민국 대통령 노무현, 그는 방송사가 실시간 생중계로 전했던 그 '어떤 차량'에 탑승한 주인공이었다.

경남 김해 봉하마을, 고향집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던 전직 대통령은 대한민국 검찰(정의의 수호자라 주장하던)의 서슬 퍼런 칼날에 몸도 마음도 깊은 상처를 입었다. 본인은 물론 부인과 자식, 친척까지 검찰의 서슬 퍼런 칼날에 시달렸다.

   
  ▲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사진공동취재단  
 
언론은 이를 중계했다. '범죄자 노무현'. 언론은 그렇게 규정했다. 그렇게 전달했다. 물론 뚜렷한 증거는 없다. 하지만 언론은 법원에서 판사가 판결을 내리기 전에 결론을 냈다. 여론재판, 무서운 재판이다.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누군가는 '인격 살인'의 처참한 현실을 경험했다. 2009년 4월30일 오전 8시께 수많은 언론이 지켜보는 가운데 노무현 전 대통령은 봉하마을을 떠났다.

노 전 대통령은 "국민들께 면목이 없다"고 짧게 말했다. 그의 표정은 무엇을 말하려는 것 같기도 했고, 현실을 달관한 표정 같기도 했다.

오후 1시께 대검찰청에 모습을 드러내자 또 수많은 언론이 그를 기다렸다. 얼굴은 짙은 어둠이 드리웠다. 그는 담담하게 대검찰청으로 들어섰다. 정의의 수호자라 주장하는 바로 그 공무원들 앞에서 전직 대통령은 조사에 임했다.

"바로 구속시킬 것이다." "아니다. 일단 집으로 돌려보낼 것이다." 언론의 의견은 분분했다. 어떤 결과이건 다르지 않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미 범죄자로 취급받았다. 검찰과 언론은 짜릿한 '손맛'을 즐겼다.

평생 한 번 낚을까 말까 한 '대어'가 걸려들었다고 판단했을까. 균형감각과 객관성도 잃은 채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2009년 4월30일 대한민국에서 벌어졌던 일을 기록한 5월1일자 그 역사적인 기록이 담긴 신문 보도를 살펴보자.

동아일보는 1면에 <노 "아니다, 모른다"…박연차와 대질도 거부>라는 머리기사가 실렸다. 1면 하단에는 <구차한 비극, 상처받은 국민>이라는 송우혜 소설가 기고문이 실렸다. 5면에는 <5공 비리에 명패 던진뒤 20년…비리혐의로 검 조사 받아>라는 기사가 실렸다. <부끄러운 대통령사 언제까지 반복할 건가>라는 사설도 실렸다.

   
  ▲ 동아일보 2009년 5월1일자 1면.  
 
조선일보는 1면에 <"아니다…모른다…생각 안난다">라는 기사를 실었고, 5면에는 <법조계 대다수 "그가 무죄라면 앞으로 누굴 처벌할 수 있겠나">라는 기사가 실렸다. 조선일보가 얘기하는 법조계는 누구일까. 법조계 대다수가 유죄라고 하니, '여론재판'은 종착역에 다다른 것 아닐까. 

조선일보는 "노 전 대통령이 유죄 판결을 받게 되면 중형을 피하기 어렵게 된다"면서 "특정범죄가중처벌법의 적용을 받게 돼, 징역 10년 이상 또는 무기징역에 처해지도록 돼 있다"고 보도했다.

조선일보 주장은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그런 것은 당시 중요한 게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여론재판'이 목적이라면 이미 100% 달성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인격은 난도질당했고, 회복 불능의 상황에 놓였기 때문이다.

중앙일보는 어땠을까. 중앙은 1면에 <'박연차 대질' 거부>라는 머리기사를 실었다. 중앙은 2면에 <다른 듯 닮은꼴 전직 대통령의 추락>이라는 기사를 실었고, 3면에 <논쟁 즐기던 달변가 "면목이 없습니다" 도덕적 실패자인>이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 조선일보 2009년 5월1일자 5면.  
 
언론에 비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모습은 말 그대로 초라했다. 조중동만이 이런 보도태도를 보였을까. 그렇지가 않다. 상당수 언론의 논조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법원이 최종 판단을 할 때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여론재판'은 언론에 의해 이미 다 나와 있었다.

오랜 조사를 끝내고 대검찰청 문을 나서는 노무현 전 대통령 어깨는 처져있었다. 법리공방을 벌여보겠다면서 담담하게 수사에 임했던 그 노무현 전 대통령 모습이 아니었다. 검찰과 언론이 즐겼던 그 '손맛'은 진실의 기록물일까.

노무현 전 대통령은 검찰 문을 나선 지 23일 만인 2009년 5월23일 고향인 봉하마을 부엉이 바위에서 뛰어 내려 서거했다. 전국은 충격에 휩싸였다. 대한민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전직 대통령이 검찰 수사 과정에서 스스로 목숨을 끓는 일은 보통 사람들이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큰 사건이었다. 전국에 추모의 물결이 일었다. 봉하마을을 향해 강원도에서 전라도에서 부산 경남에서 대구 경북에서 제주도에서 충청도에서 그리고 서울 인천 경기에서 수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 경향신문 2009년 5월25일자 1면.  
 
서울 시민들의 추모 열기도 뜨거웠지만, 추모 장소로 활용될 것처럼 보였던 '서울광장'은 굳게 닫혀 있었다. 경찰 버스로 둘러싸고 경찰들이 삼엄하게 경계했다. 추모 열기에 두려움을 느낀 누군가의 판단 때문이었을까. 왜 두려울까. 무엇이 두려울까. 알 수 없다.

누군가는 서울광장의 '벽' 앞에서 다시 눈물을 흘렸다. 언론을 향해 분노의 감정을 표출했다. 검찰을 향해 억눌린 감정을 표출했다. 하지만 서울광장은 쉽게 시민의 발걸음을 허락하지 않았다. 광장의 의미를 상실한 거대한 잔디 정원일 뿐이었다.

이런 상황을 예상했던 것일까. 노무현 전 대통령이 남긴 유서에는 이러한 대목이 나온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 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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